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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수준을 가늠하는 가장 확실한 척도는 권력이 자신을 향한 비판적 칼날을 대하는 태도다. 통치권자나 집권 세력이 언론을 '국민의 알 권리를 대변하는 감시견(Watchdog)'으로 인정하느냐, 아니면 '국정 홍보의 시녀'로 길들이려 하느냐에 따라 체제의 품격이 갈린다.

- /김종훈 보도국장
최근 한국과 미국, 태평양을 사이에 둔 두 나라에서 전해진 일련의 소식은 언론 자유의 근간이 얼마나 취약한지, 그리고 권력의 속성이 시공간을 초월해 얼마나 닮아 있는지를 씁쓸하게 웅변한다.
국내에서는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여당 의원실 관계자가 공영방송 KBS에 항의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이 공식 확인됐다. 보도 직후 이뤄진 이 통화는 당시 법무부 장관 후보자였던 김승원 전 의원 관련 탄원서 보도를 둘러싼 것이었다.
방송사의 예산권과 인허가, 법안 통과 등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국회 상임위 핵심 관계자의 전화 한 통은 그 자체로 현장 취재기자와 데스크에게 거대한 보이지 않는 압박이자 검열의 칼날이다. “단순한 사실 확인”이라는 해명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다. 이는 방송법 제4조가 엄격히 보장하는 ‘방송 편성의 자유와 독립’을 정면으로 위흔드는 노골적인 외압 시도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태평양 너머 백악관의 풍경은 한술 더 뜬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최근 자신에게 비판적인 논조를 이어온 CNN, 폴리티코, MS나우 등 주요 매체 소속 기자들의 백악관 출입을 전격 금지하고 출입증을 무단 압수했다.
비판 보도를 '암과 같은 가짜뉴스'로 규정하며 물리적으로 마이크를 빼앗고 문을 걸어 잠근 것이다. 민주주의의 보루로 불리는 미국 수정헌법 제1조의 '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행정부 수반이 정면으로 짓밟았다는 거센 비판과 함께 헌법 소송전으로 치닫고 있다.
형태와 수위의 차이만 있을 뿐, 입맛에 맞지 않는 기사를 힘으로 틀어막으려 한다는 점에서 두 사건의 본질은 같다. 그리고 이 기시감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전두환 신군부 독재 시절의 언론 탄압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든다.
1980년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정권은 집권 직후 비판적인 신문과 방송을 강제로 쪼개고 합치는 ‘언론통폐합’을 단행했고, 수천 명의 언론인을 길거리로 내쫓았다. 매일 아침 문화공보부 홍보조정실을 통해 각 언론사에 하달된 ‘보도지침’은 권력의 언론 통제가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정권의 치부가 드러날 때마다 정권은 보도지침을 통해 국민의 눈과 귀를 철저히 가렸다.
전두환 정권의 언론 통제는 언론사 몇 곳의 입을 막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비판적 언론을 거세한 자리에 권력 찬양과 관제 여론을 채워 넣어 국민의 알 권리를 말살하고, 종국에는 체제 정당성의 파멸을 자초했다. 권력이 언론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그 오만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허물어뜨리는 독약이 된다.
80년대 권력이 대놓고 입을 막았다면 오늘날의 권력은 예산과 인허가권을 쥔 상임위의 은밀한 항의 전화, 마음에 들지 않는 기자의 출입을 배제하고 취재원을 차단하는 행위 등 '외압'을 한다고 해서 국민의 눈과 귀를 막을 수 없다. 마이크를 뺏고, 전화를 걸고, 문을 닫는다고 해서 진실이 가려지지는 않는다.
언론이 불편하다면 그것은 언론이 본연의 감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권력이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비판적인 기자가 아니라, 정권의 눈치를 보며 침묵하는 언론이다. 권력이 언론의 마이크를 빼앗으려 할 때, 결국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은 주권자인 국민 전체다. 역사의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리려는 일체의 ‘입틀막’ 시도에 언론계와 시민사회가 단호히 경종을 울려야 하는 이유다. 과거 ‘소통과 탈권위’를 명분으로 추진된 ‘용산 대통령실’ 도어 스테핑 중단도 결국 불통과 권위주의로 정권을 몰락으로 몰아갔다. 국민의 목소리와 여론의 경고를 무시하고 독불장군처럼 듣고 싶은말만 듣기 위해 입틀막을 시도하면 민심은 결국 떠나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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