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 "'경주기행', 두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뷰]
등록 2026.08.30 00:01
  • 영화 '경주기행'에서 옥실 역을 맡은 배우 이정은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경주기행'에서 옥실 역을 맡은 배우 이정은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안 가본 길이니까. 배우는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하는 것 같아요. 익숙한 얼굴이 편안할 수 있겠지만, 늘 다른 면의 얼굴도 보여줘야 한다는 숙제를 품고 있죠."

    배우 이정은이 말했다. 이정은에게 영화 '경주기행'은 두려운 선택지였다. 가족을 잃은 슬픔과 분노를 8년 동안 품은 채 복수의 끝까지 나아가는 엄마 옥실. 이정은은 작품을 선택하면서도 자신이 옥실의 감정에 온전히 도달할 수 있을지 두려웠다. 그럼에도 '배우'라는 마음으로 묵묵하게 도전의 길을 걸었다.

    ‘경주기행’은 수학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한 막내딸 경주(황현정)를 위해 8년의 기다림 끝에 ‘죽이는’ 여행을 떠난 엄마 옥실(이정은)과 세 딸 장주(공효진), 영주(박소담), 동주(이연)의 가족 복수극이다. 이정은은 영화 ‘갈매기’ 현장에서 만난 김미조 감독에게 “시나리오를 보내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김 감독은 각본을 쓸 때부터 이정은을 옥실 역으로 염두에 뒀다.

  • 영화 '경주기행'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경주기행'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시나리오를 보면서 마냥 좋지만은 않았어요. ‘이걸 하면 너무 좋겠다’는 마음과 동시에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죠. 무엇보다 옥실이 용서하게 될까 봐 두려웠어요. 지금까지 큰 변화를 겪으며 끝까지 나아가는 인물을 많이 맡았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감독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묘한 책임감과 부담감을 느꼈어요. 하기에 너무 좋은 작품인데, 막상 당사자가 되면 괴로울 것 같았죠.”

    두려움 속에서도 이정은이 출연을 결심한 이유는 분명했다. 아직 걸어보지 않은 길이었기 때문이다. 촬영을 마친 뒤에도 의문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정은은 “대사를 내뱉는 순간이 감독님이 그린 순간과 일치했을까, 관객이 옥실을 따라오며 공감할 수 있을까, 내가 그 지점에 잘 도달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라면서도 “두려움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간 것 같다”라고 돌아봤다.

    옥실은 딸을 잃은 슬픔과 분노를 겉으로 쉽게 터뜨리지 않는다. 이정은은 그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사고 직후 옥실과 남편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이후 가족이 어떻게 살아왔을지를 김미조 감독과 세밀하게 논의했다. 감정적인 반응은 남편 쪽에 더 두고, 옥실은 무너진 가족의 울타리를 지켜내야 하는 사람으로 설정했다.

  • 영화 '경주기행'에서 옥실 역을 맡은 배우 이정은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경주기행'에서 옥실 역을 맡은 배우 이정은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옥실은 집에서 재봉 일을 하지만 경제권을 가진 여성이에요. 가족의 붕괴를 가장 무겁게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죠. 그래서 감정을 절제하는 방향을 선택했어요. 사랑을 고르게 표현하지는 않지만, 가족을 하나의 띠처럼 두르고 있는 사람이에요. 동주가 일탈하면 심하게 분노하는 것도 딸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 느끼는 불안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지 않고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다부진 엄마로 가려고 했죠.”

    특히 동주가 사라지자, 극도로 불안해하는 옥실의 모습에는 이정은의 개인적인 기억도 녹아들었다. 가족의 죽음을 겪은 뒤 외출하지 않게 된 조모를 떠올리며, 옥실에게 ‘눈앞에 보이지 않는 가족’이 어떤 공포를 일으킬지 이해할 수 있었다.

    “조모님이 원래 굉장히 밝은 분이셨는데, 가족이 밖에서 세상을 떠난 뒤 외출을 하지 않으셨어요. 내가 집을 나갔을 때 일이 벌어졌다는 트라우마가 외출하지 않는 행동으로 이어진 거죠. 옥실도 남편과 딸을 잃었으니, 가족이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상황을 견디기 어려웠을 거예요. 이 가족이 얼마나 폐쇄적으로 뭉쳐 살았을지 생각했어요. 옥실에게는 내가 가는 것과 가족이 함께 가는 것을 분리해 본 적이 없다는 점이 중요했죠.”

  • 영화 '경주기행'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경주기행'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옥실을 연기했지만, 이정은은 세 딸의 마음에도 깊이 공감했다. 특히 첫째 장주가 짊어진 책임감에는 이른바 ‘K 장녀’의 비애가 담겨 있다고 봤다. 부모의 뜻을 자기 뜻처럼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 행복을 찾고 싶은 마음, 불행한 엄마를 보살펴야 한다는 의무감이 모두 이해됐다는 것이다.

    “장주의 말이 모두 이해됐어요. 너무 미안하면서도 허무하기도 했죠. 엄마에게는 엄마의 길이 있으니까요. 반면 둘째와 셋째가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며 가족을 떠나지 못하는 마음도 이해됐어요. 동주가 ‘내 꿈은 뭐였어? 내 태몽은 뭐였어?’라고 묻는 장면이 있는데, 저도 예전에 부모님에게 오빠 이야기 말고 제 이야기를 해달라고 물었던 기억이 있어요.”

    세상을 떠난 막내 경주 역의 황현정과는 촬영 전부터 특별한 관계를 쌓았다. 황현정은 대본 리딩 날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복사해 이정은에게 건넸고, “엄마, 저는 이렇게 자란 사람이에요”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정은은 초대받아 가게 된 황현정의 집에서 그의 실제 어머니를 만나 옥실을 연기할 중요한 힌트를 얻었다. 옥실의 멈춰버린 시간의 끝에 있던 막내 경주와의 시간은 그렇게 완성됐다.

    “현정이 어머니가 저와 비슷하게 생기셨더라고요. ‘내가 너의 엄마이고, 실제 엄마의 모습도 많이 닮았으니, 이것이 힌트가 되겠다’라고 생각했죠. 현정이가 어머니에게 애교를 많이 부리는 딸이었어요. 그 모녀의 관계에서 좋은 레퍼런스를 얻었고, 현정이와의 장면은 어렵지 않게 촬영할 수 있었어요.”

  • 영화 '경주기행'에서 옥실 역을 맡은 배우 이정은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경주기행'에서 옥실 역을 맡은 배우 이정은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완성된 영화에서 이정은이 가장 힘들었다고 꼽은 대목은 백상현 역의 변요한과 마주하는 장면이다. 촬영 막바지에 진행된 데다, 딸이 당한 만큼 돌려주려는 옥실의 행위가 배우로서도 불편하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정은은 마음껏 감정을 쏟아낼 수 있도록 받아준 변요한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친하고 서로 신뢰했기 때문에 할 수 있었어요. (변)요한 씨가 제가 마음껏 연기할 수 있도록 받아줬죠. 감정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말들이어서 마음이 힘들었어요. 백상현이 고개를 타조처럼 움직이며 한 번에 상대를 보지 않는 모습이나, 차 안에서 씩 웃는 얼굴은 저도 정말 무서웠어요. 그 시기에 여러 작품을 하면서도 그렇게 큰 에너지를 쏟는 것을 보고 놀랐죠. 그 와중에 연애하고 결혼까지 했다는 것도 놀라워요. 정말 에너자이저예요.”

    이정은은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천국보다 아름다운' 등의 작품을 통해 '엄마'라는 역할에 깊은 몰입을 선사해왔다. 하지만 이정은이 주목하는 것은 '엄마'라는 역할이 아니었다. 그가 작품을 통해 고민하는 것은 윗세대에서 아랫세대로 넘겨주지 말아야 할 숙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다. 전근대적인 엄마나 자녀에게 집착하는 엄마를 연기할 때도 단순히 모성으로 접근하기보다 그 행동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를 들여다본다.

    “우리 세대의 숙제를 다음 세대에 넘겨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요. 이 시대에 어떤 어른으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까? 저도 작품을 통해 배우죠. 자녀에게 집착하는 엄마를 연기한다면 그 집착과 소유욕이 어디서 나오는지 공부하게 돼요. 후세대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이 제 몫이라고 생각해요.”

  • 영화 '경주기행'에서 옥실 역을 맡은 배우 이정은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경주기행'에서 옥실 역을 맡은 배우 이정은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옥실을 연기하며 이정은이 다시 확인한 것도 대화의 중요성이었다. 마음이 병든 뒤 회복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대화하지 않으면 상처는 계속 묻히고 가라앉는다. 피해자의 가족에게 꼬리표만 붙일 뿐 그들의 이후 삶과 행적에는 무관심한 사회의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피해자 가족을 다룬 자료를 보니 영화처럼 복수에 나서는 가족은 많지 않다고 해요. 더 큰 재앙이 올까 두려워서, 혹은 인간의 뇌가 감당할 수 없어서 더 빨리 잊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누군가는 끝까지 기억하죠. 행복해지기 위한 기준이 사람마다 다른 것 같아요. 과거를 놓아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을 잡아야만 비로소 앞으로 갈 수 있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견해의 차이에서 또 다른 비극이 생기기도 하죠.”

    이정은은 아직도 옥실의 여정을 완전히 떠나보내지 못했다. “내가 여기에 도달하는 동안 용서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는 옥실의 마음을 제대로 전달했는지, 관객이 그 길을 함께 걸을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계속 묻고 있다. 하지만 완벽한 확신에 이르지 못했더라도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노력한 시간 자체가 배우로서의 성장이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이정은이 뚜벅뚜벅 걸어온 배우의 길이 그에게는 모두 의미 있는 빛을 발한다.

    “부족하다고 느끼면서도 가끔은 ‘자뻑(자화자찬)’할 때가 있어요. ‘오 나의 귀신님’에서는 귀신을 정말 잘 쫓아다녔고, 이번에는 비닐을 너무 잘 감았다는 뿌듯함이 있죠. 정서적으로 인물과 완전히 일체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한 경험도 소중해요. 간극이 있다면 앞으로 어떻게 메워갈지 생각하게 되니까요. 그것도 모두 성장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