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쩔수가없다' 스틸컷 / 사진 : CJ ENM, 모호필름
* 해당 리뷰에는 영화 '500일의 썸머'와 '어쩔수가없다'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Nice to meet you. I'm autumn. (만나서 반가워요. 나는 어텀(가을) 이에요.)"
영화 중에 '500일의 썸머'라는 작품 속 나오는 대사다. 톰(조셉 고든 레빗)은 500일 동안 특별한 여인 썸머(주이 디 샤넬)에게 뜨겁게 빠져있었다. 그런데, 결국 썸머는 가고, 썸머로 인해 달라진 톰 앞에 새로운 여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앞에 대사는 여자가 하는 말이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서 나왔던 뜨거운 사랑의 계절인 '썸머'와 새로운 사랑인 '어텀'은 영화 '어쩔수가없다'에서는 또 다르게 읽힌다.
만수(이병헌)의 봄, 여름은 뜨거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제지회사에 취업해, 공장에 다니면서도 치열하게 공부해 방통대 학사학위를 땄다. 어린 아들을 키우는 싱글맘 미리(손예진)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해 그와 결혼해 가정을 이뤘다. 미리와의 사이에서 어린 딸도 태어났다. 그리고 어린 시절 자신이 살았던 집도 다시 샀다(대출을 많이 받았지만). 그 집에서 자신의 훈장 같은 네 가족이 회사에서 온 장어를 먹는다. 정원에서 배롱나무 꽃잎이 날린다. 벅찬 마음에 만수는 외친다. "그래~ 와라, 가을아!"
하지만 만수의 가을은 녹록지 않다. 가을의 수확 같던 장어는 사실 회사의 해고 통보였다. 모든 것이 엇갈렸다. 제지회사에서 자신에게 (월급으로) 모든 걸 주었던 종이는 실업 1년 만에 압류 통지서가 되어 돌아왔다. 다급해진 아내 미리는 치위생사로 재취업했다. 딸의 첼로 레슨비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줄여가기로 했다. 집도 포함해서다. 만수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어떻게든 빨리 취업해야 한다. 무작정 '문 제지'를 찾아가 필사적으로 이력서를 내밀어본다. 하지만, 반장 선출(박희순)에게 굴욕만 당할 뿐이다. 재취업 시장에서 밀려만 온 만수는 결심한다. 경쟁자들을 제거하기로. 자신만의 전쟁을 시작한다.
인생의 가을은 묘한 계절이다. 아이들은 커가고, 젊음을 잃어감을 느낀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이 겨울을 맞닥뜨려야만 하는 계절이다. '어쩔수가없다'는 그런 인생의 '가을'에 대한 영화다. 일단 영화의 계절이 가을이고, 연신 낙엽이 진다. 영화의 문을 여는 첫 대사도 "와라, 가을아"다. 만수는 다 이루었다고 여름의 계절에 생각했고, 가을의 계절에 상실을 경험했다. 그 상실은 그가 25년 동안 헌신했던 '종이'의 운명과도 같다. 종이는 핸드폰과 태블릿 등에 어느새 자기가 설 자리를 잃어간다.
만수는 '어쩔수가없다'는 선택을 한다. 경쟁자들을 죽인다는 선택을 하며 연신 되뇌는 말은 "어쩔수가없다"이다. 하지만, 정작 라이벌을 찾아간 만수는 그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매력적인 아내 아라(염혜란)에게서 실직 후 멀어져만 가는 범모(이성민), 미술을 하는 딸을 위해 실직 상황에서 남의 발에 신발을 맞추며 비위를 맞추는 시조(차승원), 그리고 호기롭게 사람들에게 호통을 치며 당차게 살아가는 선출(박희순)은 자기 아내, 자기 딸, 그리고 자기의 젊은 날을 바라보게 한다. 그렇기에 어쩌면, 만수가 죽이기로 한 선택을 한 건, 자기 자신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위해, 자기를 죽이고, 죽이고, 죽였지만, 결국 도달한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슬프고 애틋한 결말이다.
과거 유재석은 KBS2 예능 '해피투게더'에서 결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래도 결혼하고 한가지 잃은 게 있다면?"이라는 질문에, 유재석은 이렇게 답한다. "나는 (결혼하고) 오만가지 이상을 얻었어. 잃은 건 딱 하나야. 나를 잃었어." 만수의 마지막이 더욱 애틋하게 다가오는 건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일 거다. 회사에서도, 가정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아등바등 나 자신을 갈고, 죽이며 살아가도 결국 손에 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애틋함이 이 작품을 통해 더 크게 와닿는 건 정말 '어쩔수가없다.'
만약, 대놓고 슬프거나 진지하게 그렸다면, 이런 상상이나 대입을 하기 어려웠을 거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은 영화 '어쩔수가없다'를 블랙 코미디 장르의 외피를 입혔다. 배우들은 유독 음악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첫 장면부터 그렇다. 피아노 솔로로 시작하다가, 집과 가족들이 하나, 둘씩 등장하면 비로소 오케스트라 음악이 펼쳐진다. 그 풍성한 음악 위에서 만수의 "다 이루었다"라는 대사는 헛웃음을 유발한다. 조용필의 곡 '고추잠자리' 완곡이 크게 등장하며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슬퍼지지"라는 가사는 뒤엉킨 만수(이병헌), 범모(이성민), 아라(염혜란)이 각자의 몸부림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감정을 더한다. '어쩔수가없다' 속에서 음악은 어쩔 수가 없다고 등장한 적이 없었다. 한 인물이 듣고 있는 곡에서 볼륨이 높았다가 작아졌다.
'고추잠자리'처럼 대놓고 뒤엉켜있지 않더라도, 인물들은 어떤 식으로든 모두 '세상은 요지경'처럼 뒤엉켜있다. 배우 이병헌, 손예진, 이성민, 염혜란, 차승원, 박희순 등은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찬란한 춤을 춘다. '베니스영화제'에서 "마에스트로 박"이라고 외치는 관객의 환호처럼, 박찬욱 감독은 '마에스트로'가 되어 영화에 존재한다.
잔혹하지만, 웃기고, 아름답지만, 서글프다. '식물인간'이라고 불릴 정도로 식물을 사랑하지만, 그가 식물을 사랑하는 방식은 굵은 철사로 잡아놓은 모양대로 자라는 모습이다. 나무를 심고, 기르지만, 자르고, 가공한 종이로 삶을 유지하고, 그러기 위해 총을 쥐었다. 모순과 역설이 계속 떠올라 되뇌어 씹어보며 나에게 다가올, 혹은 내가 맞은, 혹은 내가 맞을 가을을 비춰보게 하는 것을 '어쩔수가없다'. 상영시간 139분. 15세이상 관람가.
Copyright ⓒ 디지틀조선일보 - 디지틀조선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