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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酒歌] 안동 맹개술도가의 진맥소주와 세미용 와인

박수민 기자 ㅣ adio2848@chosun.com
등록 2025.01.16 16:16

[에버포티의 광화문酒歌]

안동에는 토박이는 잘 모르지만 SNS에서 핫한 숨은 명소가 있습니다. 바로 '맹개마을'입니다.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위치한 맹개마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퇴계 이황과도 막역한 사이였던 농암 이현보 선생의 종택이자 600년 동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양주인 일엽편주로 유명한 '농암종택'에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건넌 위치에 있습니다.

육지 속의 섬이라고 불릴만큼 고립된 지형 덕에 교통이 불편해서 살던 이들도 모두 떠나 한 때는 오두막만 한 채 덩그러니 남아 버려져 있던 땅입니다. 독일 유학 후 IT벤처 기업을 경영했던 박성호 이사 김선영 대표 부부가 이 땅을 보고 한 눈에 반해 2007년부터 3만평 정도의 넓은 부지에 밀과 메밀을 재배해 소주를 빚으며 체험 관광의 공간으로 18년 째 공들여 가꿔오고 있습니다.

그 노력이 빛을 발해 작년에는 '한국 관광의 별'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성탄절을 앞둔 12월의 주말, 전통주를 연구하시는 분들과 함께 맹개마을의 진맥소주 양조 과정도 견학하고 숙소인 '소목화당'에서 하룻밤 머무는 귀한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안동소주는 쌀이나 찹쌀로 청주를 만들어 증류하지만 진맥소주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밀로 만든 소주'입니다. 오랫동안 명맥이 끊겨 있던 밀 소주를 박성호 이사가 1540년 경 쓰여진 고조리서 '수운잡방'의 기록을 토대로 연구 끝에 복원해낸 방식으로 직접 재배한 유기농 통밀과 메밀을 사용해 빚고 있습니다.

18년 전 안동으로 귀농한 박성호 씨(농업법인 밀과노닐다 대표) 부부가 차린 양조장 맹개술도가/에버포티

밀 수확부터 증류, 숙성까지 한 병의 진맥 소주가 완성되기에는 2년의 시간과 정성이 담겨 있습니다. 대형 증류기 앞에서 소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설명을 듣고 진맥소주가 숙성 중인 오크통들과 세계 각국의 다양한 와인들이 함께 보관되어 있던 맹개술도가의 토굴에 들어서니 구수하게 술 익는 내음이 코 끝을 사로잡습니다.

진맥소주를 숙성 중인 미국 수입 오크통들이 즐비한 가운데 와인 애호가인 저는 자꾸 와인 셀러로 눈길이 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는데 양조가인 박성호 이사의 술에 대한 애정이 와인을 즐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닐까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견학 후에는 웰컴푸드와 함께 진맥소주 22도, 40도, 53도 3종을 시음했습니다. 시그니처 라인인 40도 짜리 진맥소주가 높은 알콜 도수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목 넘김이 부드럽고 깔끔했고 구수한 누룩과 빵의 향이 잘 느껴져서 가장 맛있게 마셨습니다.

웰컴푸드로 내주신 또띠야피자, 치즈와 오디잼을 얹은 크래커와도 잘 어울렸는데 향이 잘 느껴지도록 차갑지 않은 보관 온도로 수육이나 전골 같은 따뜻한 한식 육류 요리와 함께 마셔도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미국 뉴욕의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도 납품하면서 점차 해외에서도 많이 찾고 있다고 하네요.

1540년 경 쓰여진 고조리서 '수운잡방' 기록을 토대로 복원한 밀로 빚은 진맥소주/에버포티

견학 중 시음한 진맥소주 한잔이 시동을 걸었는지 울타리가 되어준 낙동강과 병풍처럼 둘러진 청량산 기암들이 아름다워서였는지 해가 지기도 전에 숙소에서는 바로 문어를 삶고 양갈비를 구워 한잔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먹물 깨나 쓰는 '양반 물고기'라서  안동 지역 제사상에 빠지지 않는 문어숙회는 안동 여행과도 컨셉이 잘 맞았고 허브 마리네이드된 양갈비는 추운 겨울 실내 주방에서 팬프라잉해도 충분히 맛있는 연말 메인 메뉴로 딱이었습니다.

문어숙회, 양갈비와 잘 어울릴 와인을 찾기 위해 이태리, 프랑스, 호주 와인을 두고 고민하다가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산지인 시드니 근교의 헌터밸리 와인들로 문어숙회와 매칭할 세미용 품종의 드라이 화이트 와인과 양갈비와 함께 마실 쉬라즈를 준비했습니다.

문어숙회와 어울리는 화이트와인은 소비뇽블랑, 그릴로, 베르멘티노 등 다양합니다. 그러나 세미용 와인을 준비한 이유는 진맥소주처럼 '유일무이'라는 스토리를 가진 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세미용은 프랑스 보르도 지역에서 주로 재배되는 품종으로 산도가 부족하기 때문에 소비뇽블랑과 블렌딩하여 '보르도 블랑'이라는 화이트 와인으로 양조되거나 껍질이 얇아 곰팡이에 취약하기 때문에 보르도의 소떼른 지역에서 '귀부와인'이라고 불리는 고급 스위트 와인을 만드는데 주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세미용 단일 품종으로 만든 와인은 찾아볼 수 없는데 전 세계에서 호주 헌터밸리 지역이 유일하게 세미용으로만 맛있는 화이트 와인을 만들고 있습니다. 포도 열매의 산도가 살아 있을 때 수확해서 저온 스테인리스 탱크에서 21일 간 발효하여 신선한 레몬, 청사과의 과실과 달콤한 풍미가 살아있고 석회질이 풍부한 토양 덕분에 산도와 잘 조화되는 미네랄을 갖춘 맛있는 와인입니다.

짱짱한 산도 덕분에 화이트와인 치고는 10~15년 장기 숙성도 가능한 와인이지만 해산물에는 신선한 맛이 더 어울립니다. 그리고 양갈비에는 헌터밸리의 쉬라즈를 마셔봤습니다. 원래 호주 쉬라즈는 블랙베리, 체리, 바닐라, 초컬릿 캐릭터의 묵직하고 농익은 맛으로 유명하지만 헌터밸리의 쉬라즈는 피노누아를 연상시키듯 섬세함과 산도가 매력적이었습니다.

이는 최근 호주 쉬라즈 양조 방식 트렌드를 반영한 것이기도 합니다. 함께 마신 한 분은 '올해 마신 레드와인 중 가장 맛있었다'고 하시네요. 신선한 재료로 만든 맛있는 음식과 좋은 술, 맑은 공기, 정겨운 사람들이 함께 하니 오후 4시쯤 시작된 술 자리가 의도치 않게 자정을 넘기며 12시간 가까이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인도에서 왔다는 요즘 핫하다는 숙취해소제 한 알을 미리 먹은 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맹개마을이 가장 아름다운 시기는 황금밀밭이 펼쳐지는 6월과 메밀꽃이 하얗게 만발한 9월이라고 합니다. 언젠가 좋은 계절에 다시 한번 찾고 싶습니다.

[와인리스트] 

1. 맥기건 빈 9000 헌터밸리 세미용 2018 / 비비노 평점 3.6 / 국내 수입사 와이넬
2. 티렐스 스티븐스 빈야드 쉬라즈 2016 / 비비노 평점 3.8 / 국내 수입사 아영에프비씨


<필자 에버포티 소개>

22년 차 IT 업계 직장인. 주력 25년 차, 와인력 10년 차의 한 때는 주당. 40대 중반인 지금은 70대 초반까지 건강을 잃지 않고 지속가능한 음주를 하기 위해 양은 줄이고 질은 높이는 주생활을 추구하는 중이며 이탈리아의 모든 와인과 이외 힘주지 않은 모든 화이트와인을 사랑합니다. 물론 샴페인은 힘줬어도 사랑합니다. 요즘엔 전통주도 참 사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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