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넷플릭스 제공
"'새로운 얼굴을 보여드려야지'라고 생각해도 제가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니지 않나. 제 최선으로는 캐릭터가 겹치지 않게 보여드리는 거다. 최근에는 점점 내가 선택하는 작품이 '대중분들에게 보내는 편지'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저는 요즘 이런 생각을 하고 살아요. 여러분은 어때요?'라는 질문 말이다. 그렇게 서로 묻고 답하는 사이가 되고 싶다."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한 카페에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트렁크'의 주역 서현진의 라운드 인터뷰가 진행됐다.
'트렁크'는 호숫가에 떠오른 트렁크로 인해 밝혀지기 시작한 비밀스러운 결혼 서비스와 그 안에 놓인 두 남녀의 이상한 결혼 이야기를 그린 미스터리 멜로다. 김려령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극 중 서현진은 결혼 때문에 혼자가 되어버린 여자 '노인지' 역을 맡았다. 기간제 결혼 매칭 회사의 차장인 노인지는 매뉴얼에 따라 기간제 결혼 생활을 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다섯 번째 결혼 상대로 '한정원'(공유)을 만나면서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노인지는 첫 결혼에 실패했다. 아니, 실패라기에는 마무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예비 신랑 '도하'(이기우)가 양성애자인 것을 알고도 품었지만, 세상 앞에서 그를 지켜내지는 못했다. 그렇게 신랑이 사라지고 결혼은 없던 일이 됐다. 인지는 도망친 남자친구의 집을 아무 일도 없던 공간처럼 가꾼다. 어항 속 물고기를 돌보고 먹지도 않을 음식을 만들어 냉장고에 넣는다. 애써 빈자리를 채우듯 온기 없는 공간에 사람 냄새를 연출한다.
"저는 인지를 공감할 수 있는 이 대본이 좋아서 출연을 결심했다. 어디가 좋았냐라고 하면 결국 인지는 상냥했다고 생각했다. 도하의 집은 인지의 내면과 같다. 인지의 직업은 마치 평행 세계 같기도 하다. 그 직업은 인지의 외적인 모습인 거다. 누구나 사회적인 모습이 있지 않나. 방문을 닫고 들어갔을 때 나만 아는 모습. 그런 인지의 모습이 공감이 됐고, 그래서 출연했다."
인지는 5년 동안 도하를 놓지 못한 채, 기간제 결혼 생활을 업으로 삼는다. 혹자는 과거 일을 덮어두고 새 인생을 시작하면 된다지만 인지는 끝맺지 못한 관계를 그냥 덮기엔 여리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서현진은 깊은 고민 끝에 그런 인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인지는 도하와의 첫 결혼을 통해 '내가 사회적인 편견을 막아줄게. 방패막이 되어줄게'하는 자신만만함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게 얼마나 얄팍한 생각인가. 내(인지)가 먼저 결혼하자고 해서 그 사람이 상처받았으니 용서받고 싶다는 게 인지의 마음이었을 거라 생각했다. 일부분은 스스로에게 벌을 주고 있는 거다. 그 집을 깨끗하게 닦고 사람 사는 집처럼 해두는 건 죄책감에 대한 속죄라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직업적으로 결혼을 선택한 것도 의미가 있다. 처음에는 실패한 첫 결혼에 대한 오기로 시작했겠지만, 나에게 주는 형벌의 의미도 있는 것 같다. 아마 인지는 도하에게 용서받기 전에는 행복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도하를 기다린 거다."
감정적으로 절제된 인물을 연기한 서현진은 캐릭터를 준비한 과정도 언급했다.
"신경 쓴 부분은, 상대방의 감정을 예측해서 준비하지 않은 점 같다. 충분히 변화할 수 있는 상태로 가서 공유 선배님이 하시는 걸 보고 그대로 반응하려고 노력한 것 정도다. 워낙 좋은 상대 배우, 좋은 감독님와 하는 거라 '잘 해주시겠지'하는 생각이었다. 테이크를 찍고 나서 감독님이 '다른 쪽으로도 해보자'라는 걸 따라갔다. 그러면 감독님께서 적절하게 섞어서 쓰시더라. 감독님을 따랐을 때 제 생각보다 더 좋은 신이 많이 나온 것 같다."
서현진은 현장의 공을 상대역이었던 공유와 김규태 감독에게 보냈다. 특히 앞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공유가 서현진에 대해 "치밀하고 한 신도 허투루 하지 않는 배우"라고 평한 바, 서현진은 "공유 선배님 역시 치밀한 배우"라고 화답해 웃음을 자아냈다.
"저랑 같이 한 신이 아니면 현장을 못 보지 않나. 작품으로 1부부터 풀로 봤는데, 공유 선배님이 감정 레이어를 정말 섬세하게 그라데이션으로 그려놓으셨더라. '이걸 이렇게 조절했다고?' 싶은 생각을 했다. 정말 한 신도 허투루 하지 않는 배우시다. 정원이가 이해되지 않는 신이 하나도 없게 잘 표현해 주셨다. 함께 연기할 때도 느꼈지만 완성본으로 봤을 때 (공유의 연기가) 정말 좋았다."
김규태 감독은 정원과 인지가 햄버거를 먹다 키스를 나누는 신을 찍고, 두 배우를 '멜로 장인'이라 호평했다. 이에 대해 서현진은 당시 비하인드를 언급했다.
"저는 그 키스신에서 '쪽'이라고 생각했고, 감독님과 공유 선배님 두 분은 '쪽 아닌데' 하셨던 기억이 난다. 감독님께서 저에게 '자연스럽게 알지?'라고 하고 가셨는데, 제가 뭘 알겠나. 그냥 (공유) 오빠에게 '알아서 잘 부탁드린다'라고 했다. 그래서 탄생한 신이다."
"제가 선배님 덕을 정말 많이 봤다. 눈이 사랑을 가득 담은 눈이시더라. 저는 정말 많이 빚을 진 것 같다. 선배님을 정말 멜로 장인으로 인정해 드릴 수밖에 없다.(웃음)"
'트렁크'는 잔잔하고 어둡지만, 곱씹을수록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다만 도발적인 소재에 다소 불친절한 감정선이 진입 장벽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호불호 반응이 있는 바, 서현진은 "배우가 흥행력을 따져야 하는데, 뭐가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제가 분명 잘 된다 생각해도 작품이 나와봐야 아는 거고, 배우보다도 봐주시는 분들의 반응이 중요한 거지 않나"라고 운을 뗐다.
이어 "점점 (작품의 흥행은) 천운인 것 같다. 이제는 하고 싶은 캐릭터나 이야기보다도 '어떤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나'라는 생각으로 연기하는 것 같다. 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가 대본에 묻어나면 작품을 선택하게 되는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서현진은 노인지를 통해 변화할 마음을 먹었다고 말했다. 인지가 용기를 내 새로운 시작을 하듯이, 자신도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고 근황을 전했다.
"성숙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품을 선택할 때는 '과연 혼자서 사는 게 맞나'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당장 '누군가를 만나 결혼할 거야'하는 건 아니지만 나이가 들다 보니까 혼자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그런 고민을 할 시점에 '트렁크'를 만났다."
"제가 워낙 집순이이고, 변화가 쉽지 않은 성격이라 사는 게 좀 무료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도 나가서 사람들과 부대끼고, 안 해본 것도 좀 해보고. 스트레스받을 일도 있겠지만 그만큼 행복한 일도 있지 않을까 싶다. 큰일 나는 거 아니면 한 번 해볼까 싶은 마음이다. 최근 예능에 나간 것도 그런 의미였다."
사람 서현진은 변화를 준비하지만, 배우로서는 그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온 마음을 다해 연기를 대할 생각이다. "지금처럼 좋은 배우와 감독님을 만났을 때, 내가 생각한 무형의 감정들이 더 좋은 모양으로 변해서 유형이 되었을 때, 그만큼 기쁘고 사랑스럽고 즐거울 때가 없는 것 같다. 그런 마음으로 인간으로서 현장에 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