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해군이 남중국해 스트래틀리 군도의 모래톱인 세컨드 토머스 숄에 의도적으로 좌초시켜, 필리핀의 최서단을 지키고 있는 폐군함 시에라 마드레 함/필리핀 해군 제공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의 대변인이었던 해리 로케는 지난달 두테르테가 재임 시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맺은 합의 내용을 폭로했다. "필리핀은 세컨드 토머스 암초에 필수 물자만 보내고 시설 보수나 건설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합의 내용에 대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은 전 정권으로부터 들은 바 없다며 "영토 내에서 무엇을 하기 위해 타국 허가를 받아야 한다면 합의는 지키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에 주필리핀 중국 대사관은 지난 18일 "중국과 필리핀은 세컨드 토머스 암초 사태 통제에 대한 신사협정에 분명히 합의했다"며 "신사협정은 비밀 협정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필리핀은 1999년 좌초한 자국 군함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남중국해 세컨드 토머스 암초에 일부 병력을 상주시키고 있다. 이곳에 보급품을 전달하는 필리핀 함정에 중국 해경선이 물대포를 발사하는 등 최근 일대에서 양국 간 영유권 충돌이 계속되고 있다. 남중국해는 글로벌 교역 상품이 오가는 무역의 대동맥이다. 이 바다가 요동치면 국제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번 필리핀 사태는 이 지역의 맹주 역할을 노리는 중국의 행동 패턴을 파악하는 데 좋은 사례가 되고 있다.
2022년 6월 취임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은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친중 노선을 180도 뒤집고 친미 노선으로 선회했다. 남중국해에서 중국이 보여주고 있는 도발이 마르코스 대통령의 친미 노선 때문인 것으로 비춰질 수 있지만 사실상 이 지역의 긴장은 두테르테 정권 때부터 있어왔다. 필리핀 안보 전문가들에 따르면 중국 해경과 해상 민병대 선박들은 마르코스 대통령 집권 이전부터 분쟁 해역에 출몰했다. 그리고 실효적 지배 강화를 위해 필리핀 선박에 대한 위협과 도발을 거듭해 왔다. 단지 두테르테 대통령이 중국을 자극하기 꺼려했고 친중 노선의 실패를 인정하기 싫어했기 때문에 이 사실들이 은폐돼 왔을 뿐이다. 중국 융화책이 통하지 않음을 인지한 마르코스 대통령은 취임 후 과감히 친미 노선을 택했다.
그는 지난해 5월 미국에서 바이든 대통령과 회담을 갖고 필리핀 내 미군 활동 거점을 5개에서 9개까지 늘리기로 했다. 또 지난 11일엔 워싱턴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첫 3자 정상회담를 갖고 남중국해의 중국 도발에 '심각한 우려'를 표하는 한편 3국 합동훈련으로 중국에 대응키로 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구체적으로 남중국해 스프래틀리 군도 세컨드 토머스 암초에 대한 중국의 보급 방해와 필리핀 선박에 대한 항행 방해 등을 거론했다. 아울러 중국 정부를 향해 "남중국해에서 해경과 해상 민병대 선박의 위험하고 강압적인 사용과 타국의 해양자원 개발을 방해하는 시도에 단호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공고히 했다.
안보 전문가들은 "필리핀이 화해 노선을 취하든 말든 중국의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중국에 원칙을 양보하지 않고 영해 방어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한 때 일본도 중국에 융화책을 쓰다가 뼈아픈 경험을 한 적이 있다. 2009년 9년 출범한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민주당 정권은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내세우며 중국에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중국의 고압적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2010년 중국은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어선 충돌 사건을 빌미로 일본 관광 금지령을 내리고 희토류 수출을 중지하는 등의 무역제재를 가했다. 2012년 일본의 센카쿠 열도 국유화 선언에 분노한 중국은 일본이 정한 영해와 인근 접속수역에 선박을 꾸준히 파견하며 센카쿠 열도가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되면 자국 우선 '신보호주의'가 강화되고, 인도 태평양 지역에 대한 외교 정책에도 많은 변화가 생길 전망이다. 이에 대비해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은 역내 우방국 간 협력를 서둘러야 한다. 지난달 1일 마닐라에서 필리핀, 인도, 일본의 안보 경제 협력을 논의하는 회의가 일본 국제교류기금 주최로 열렸다. 필리핀은 이 회의에서 방위 장비 이전을 포함한 일본, 인도와의 협력에 대해 기대감을 드러냈다. 아시아 국가들에게 현실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은 중국과의 안정적 공존이다. 그것은 중국과의 대화만으로 절대 실현되지 않는다. 역내 국가들이 협력을 강화해 중국과 힘의 균형을 이룰 수 있을 때 비로소 영해 분쟁 지역에서의 총성이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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