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와요'에서 수연 역을 맡은 배우 이상희 / 사진 : 눈컴퍼니 제공
"이것 좀 드세요. 사과가 너무 맛있더라고요. 아침엔 사과죠."
인터뷰 현장에 사과 향기가 가득했다. 직접 집에서 사과와 칼을 챙겨온 이상희는 두 접시 가득 예쁘게 깎은 사과를 올려놨다. 아침 10시에 진행된 인터뷰는 그렇게 이색적인 사과 향기로 시작됐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와요' 속 따뜻한 엄마였고, 선배였던 '수연 쌤'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넷플릭스 시리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와요'는 명신대학교 내과 병동에서 3년 차 간호사인 정다은(박보영)이 정신과 병동으로 전과하며 시작되는 이야기를 담았다. 그 속에서 이상희는 수간호사 효신(이정은)의 바로 아래 후배이자, 스테이션에 있는 간호사들의 가장 선배의 위치에 있는 박수연 역을 맡았다. 정란(박지연)까지도 다은에게 정신과 병동을 설명할 때 "박수연 쌤은 무조건 피하라"라고 조언해 줄 정도로 꼼꼼하고 엄격한 인물인 동시에 후배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손을 꼬옥 잡아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시리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와요' 스틸컷 / 사진 : 눈컴퍼니 제공
이상희가 '정신병원에도 아침이와요'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건 '지금 우리 학교는'(이하 '지우학')으로 이재규 감독님과 미팅을 하게 됐을 때였다. 두 작품을 모두 연출한 이재규 감독은 이상희에게 "'지우학' 찍고 따뜻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라는 웹툰이 있어요. 그 작품을 하게 되면, 같이 하고 싶어요"라고 이야기했다. 수많은 작품들이 기획 단계에서 무너지기도 하기에 "저야 좋죠"라고 답한 뒤, 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팅 후 이상희는 웹툰을 보기 시작했다.
"'지우학'도 찍기 전이니 3~4년 전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그 후에 진짜 제안이 왔을 때 '진짜 하시네' 생각하며 반가웠어요. 그 말이 지켜지는 경우가 많지 않잖아요. 자극적인 콘텐츠들이 많은 요즘, 이 잔잔한 이야기가 와닿을까라는 염려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진짜 제안을 받고 너무 좋았고,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이)재규 감독님께서 제안하시면, 그 어떤 역할이든 할 생각이었어요. '지우학' 때 반했거든요. 그런데 대본까지 좋더라고요. 안 할 이유가 없죠. 저는 배우를 하기 전 간호사였거든요. 간호사가 저랑 안 맞는다고 생각해서 그만둔 직업인데요. 약간의 부채감 같은 게 마음에 남아있었나 봐요. 그런데 이 대본을 받고, 이 작품을 잘 해내면 그 마음을 좀 덜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됐고요."
시리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와요' 스틸컷 / 사진 : 눈컴퍼니 제공
이상희는 29살에 배우의 일을 시작하기 전 일반 외과에서 간호사로 근무했었다. 하지만 일반 병동에만 있었기에 특수과인 정신과 병동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와요' 속 배우들과 함께 성모병원에 조언을 들으러 간 이유이기도 하다.
"제가 있던 병동은 일반 외과라 (환자의) 생리적인 부분에 포커스를 두고 있었거든요. 그래서인지 (환자를) 관찰하거나 돌봐야 하는 부분이 좀 다르더라고요. 환자를 대하는 방식도 다르고요. 다은 쌤(박보영)은 여러 번 다녀온 것 같은데 저는 한 번 다녀왔어요. 그곳에서는 환자들의 마음 상태를 정말 세세하게 기록해 놓으시더라고요. 제가 과거 드라마 '라이프' 때는 응급실 간호사였거든요. 그래서 현장에서 모르는 직군을 할 때보다는 편했어요. '이 작품도 그렇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안 그러더라고요. 모르는 게 훨씬 많았어요. 다 같이 모여서 공부했어요. 서로 책 읽고, 추천해 주고, 환자 케이스를 공부해 나가며 의견을 주고받았어요. 제가 간호사일 때, 막 일 잘하는 스타일은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많이 혼나기도 했는데요. 수연이가 한 말 중 '이제 그만 죄송해야돼'라는 대사가 진짜 제가 간호사 때 들었던 말이에요. (웃음)"
수연은 수간호사 효신(이정은)을 제외하고 가장 선배의 자리에 있었고,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기도 했다. 바쁜 수연의 일상을 이상희는 외모부터 전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지우학' 때와는 다른 헤어 스타일이면 좋겠어요"라는 이재규 감독의 의견을 수렴해 앞머리를 만들었다. 코에 난 뾰루지까지 고스란히 카메라에 잡힌 것은 다 의도였다.
시리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와요' 스틸컷 / 사진 : 눈컴퍼니 제공
"제가 그때 다른 작품도 찍고 있어서 앞머리가 가발이었어요. 감쪽같았죠? 수연이는 되게 바쁜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생각해 보니, 예전에 화장은 하나도 안 했는데 입술만 새빨갛게 바르고 다니는 친구들이 있었어요. 감독님께도 그 의견을 말씀드렸고, 받아주셔서 '립만 바른 노메이크업'을 선택했어요. 외모보다 많이 고민한 건 내면이었어요. 수연이가 후배들 사이에서는 무서운 선생님이잖아요. 완성본에서는 편집이 많이 되긴 했는데, 실제로 제가 화내는 장면을 좀 더 많이 찍었어요. 무서운 선생님은 괜찮은데, 비호감이거나 곁에 두기 싫은 사람이 되면 안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안경을 쓰면 제 인상이 조금 더 둥글둥글해질 것 같아서 의견을 냈고요."
"수연이가 짜증을 내지 않으려고 주의했어요. 화를 내면 뒤끝이 없는데, 짜증은 돌아서면 기분이 안 좋거든요. 한 3년 전쯤, 배우들과 서로 각자의 연기를 모니터링해 주면서 우지현 배우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누나가 어느 순간에 짜증으로 확 묶어서 연기를 넘겨버릴 때가 있는데, 명확한 선택을 해주면 좋을 것 같아'라고요. 그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많이 했었거든요. 그리고 수연 쌤에게는 그 선택이 필요할 것 같았고요. 그래서 현장에서 감독님께 많이 여쭤봤어요. 짜증이 담긴 것 같은지, 괜찮은지에 대해서요."
시리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와요'에서 수연 역을 맡은 배우 이상희 / 사진 : 눈컴퍼니 제공
수연을 이야기하며 '정신병동에도 아침이와요' 5화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워킹맘인 수연은 병원에서는 후배들에게 민폐가 되지 않으려고 일에 애쓰고, 집에서는 아이들과 함께하지 못한 미안함에 몸과 마음을 쓴다. 열이 나는 아이를 퇴근하고 나서야 데리고 와서 미안한 마음을 삼키는 이상희의 모습은 워킹맘이라면 모두 공감할 수밖에 없던 장면이었다.
"제가 뭘 작정하고 준비한 건 아니에요. 주변 친구들이 아이를 키우고 있으니까요. 지금 친구 아이 중 중학생이 된 친구도 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옆에서 지켜봐 온 것 같아요. 정말 멋있었던 내 친구가 어느 순간, 그 친구는 조금씩 없어지고 되게 멋있는 엄마가 되어가는 거죠. 그러다 한 번씩 터져서 울다 가고 그러면 짠하죠. 멋있기도 하고. 그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바라보게 되는 것 같아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상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친구를, 수연이를, 이상희가 어떻게 바라보고 연기했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리고 마음이 "너무 애쓰지 마. 너 힘들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권주영(김여진)의 말을 듣는 수연이의 모습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 장면을 하루 종일 찍었어요. 정말 많이 우셨어요. 그냥 울었다고 표현하고 싶지 않아요. 정말 진심을 다하셨어요. 정말 감동적이었고, 멋있는 선배님이시라고 생각했어요. 되게 좋았어요. 그 모습을 저는 오롯이 다 봤잖아요. 예전에 나문희 선생님과 연기할 때도 그런 기분이 든 적이 있었거든요. (김)여진 선배님과도 그랬어요. 사실 수연이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면 했어요. 대본에는 '눈가가 촉촉해진다'라고 적혀있었거든요. 마지막에 수연이가 '애쓰셨다'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말은 대본에 없었어요. 그냥 그날의 제 마음이었어요.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시리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와요'에서 수연 역을 맡은 배우 이상희 / 사진 : 눈컴퍼니 제공
이상희는 과거 '정말 먼 곳', '연애담' 등 수많은 독립 영화 속에서 열연하며 '독립영화계의 전도연'이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다. "전도연 선배님 만나 뵙게 되면 얼마나 송구하겠습니까"라고 웃으며 손사래 치는 그지만, 활약은 이어지고 있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라는 작품 속 수연처럼 긴 호흡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닌, 영화 '독전2' 속 덕천의 아내로 짧게 등장하는 순간에도 이상희는 '극'을 '일상'으로 확 끌고 들어가 버린다. 어디에선가 잠든 아이를 안고 혼잣말을 내뱉을 것 같은 워킹맘으로, 후배의 따뜻한 손을 잡아주는 선배로, 시청자들의 일상을 극 속으로 데려간다.
"사람마다 되게 여러 모습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하거든요. 저에게도 갑자기 낯선 모습이 나올 때가 있어요. 그런 순간들 중 캐릭터와 닮은 순간을 찾아보는 것 같아요. 캐릭터에게 다가가는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저는 그걸 제 안에서 꺼내는 편이에요. 저는 사실 연기는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안에 얇은 막이 있는데, 그걸 바라보고, 뚫을 수 있다면 더 좋고요. 좋은 연출자가 있다면 더욱더 좋고요. 그런데 오래 하다 보니, 좋은 배우는 좋지 않은 환경에서도 좋은 연기를 해내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것들이 내공인가보다 생각했습니다."
인터뷰를 마친 후에도 사과 향은 현장에 남았다. 이상희는 앞으로도 계속 자신 속에서 다른 누군가를 찾아낼 거고, 그 모습을 대중들은 마주할 행운을 얻게 될 거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와요'를 본 후, 이상희가 남긴 '수연 쌤'의 향기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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