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의 한 대형마트에서 라면 코너를 살펴보는 시민 모습. / 뉴스1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라면값 인하' 발언에 라면업체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국제 밀 가격 대비 높은 라면 값이 조정돼야 한다는 것인데, 업체들은 다방면으로 검토하겠다면서도 밀 가격 외 다른 원재료들은 값이 올라 인하 요인이 뚜렷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20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추 부총리는 지난 18일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지난해 9, 10월 (라면 값이) 많이 인상됐는데 현재 국제 밀 가격이 1년 전보다 약 50% 내려갔다"며 "기업들이 밀 가격 하락에 맞춰 적정하게 판매가를 내렸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라면과 같은 품목은 시장에서 업체와 소비자가 가격을 결정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추 부총리의 발언은 국제 밀 가격이 최근 큰 폭 하락해 지난해 절반 수준으로 내려간 데 기인한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식품산업통계정보에 따르면 지난달 국제 밀 가격은 톤(t)당 228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419달러) 대비 45.6% 하락했다. 추 부총리는 “정부가 하나하나 원가를 조사하고 가격을 통제할 수는 없다”며 “이 문제는 소비자 단체가 압력을 행사하면 좋겠다”고 했다.
주요 라면업체들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라면 가격을 줄줄이 올렸다. 국내 1위 라면 기업 농심이 11.3% 인상한 데 이어 오뚜기와 삼양식품, 팔도 역시 가격을 10% 안팎으로 올렸다. 이들 업체의 가격 인상으로 5월 라면 소비자물가지수는 지난해 보다 13.1% 올랐다.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장 많이 오른 것이다.
원가 부담은 다소 줄었는데 인상된 가격은 유지돼 기업들 실적은 좋아졌다. 농심의 1분기 영업이익은 지난해 대비 85% 늘었고, 오뚜기 역시 10% 증가했다.
라면업계는 정부로부터 공식 요청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가격 부담 완화를 위해 검토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삼양식품 관계자는 "어려운 부분이 많지만 가격 부담을 줄일 수 있는 방법 무엇일지 내부적으로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뚜기 관계자는 "당장 가격 등을 적용할 수 있지 않기에 여러 가지 검토중인 상황"이라며 "다양한 방안 및 시장 추이를 보면서 논의 중이다"고 전했다. 농심 관계자는 "어려운 여건이지만 다방면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라면 업체들은 밀가루 외 다른 가격 상승 요인이 많다고 지적한다. 또 국제 밀 가격이 내려갔을 뿐, 국내에서 만드는 밀가루 가격은 내려가지 않았고, 밀 가격이 내렸더라도 회사들이 사들이는 가격에 반영되는 데에는 일정 기간 시차가 있다는 설명이다.
라면업계 관계자는 "밀 가격에 따라 라면 가격이 왔다 갔다 하는게 아니다"라며 "밀 사오는 제분사 가격도 사실 그대로"라고 말했다. 이어 "밀세가 반영되기에는 오랜 시간이 더 걸리기 때문에 당장 가격 조정할 수 있는 건 없고 다양한 방안 고려하면서 논의 중이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라면은 밀 외 여러 원재료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제품"이라며 "또 포장재 비용, 인건비, 공장 비용을 포함해 판매 관련해서는 물류, 운송 비용 등이 많이 오른 상황"이라고 했다.
라면업계는 이명박 정부 시절이던 2010년 가격을 인하한 뒤 지금까지 한 번도 가격을 내린 적이 없다. 때문에 가격 인하까지는 일정 부분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과거 정부 때 라면 값 인하와 관련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며"가격 조정까지 일 년 반 내지 이 년까지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가격 인상 또는 인하를 결정할 때 실적 등을 고려해 사업 계획 세웠을 테고, 또 원재료 가격도 정해져있는 상황이라 이런 것들이 다 검토돼야 조정이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각에서는 라면업체가 치솟는 국제 물가를 핑계 삼아 상품 가격을 올려 이익을 취하는 이른바 그리드플레이션(greedflation)의 전형적인 행태라는 지적도 나온다.
소비자 A씨는 "소비자에게 비용을 전가하는 방식의 이윤 착취는 없어져야 할 것"이라며 "무분별하게 값을 올리는 등 서민을 등한시하는 라면업체들의 태도에 정부가 나서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