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음 소희'를 연출한 정주리 감독 / 사진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 본 인터뷰에는 영화 '다음 소희'의 스포일러가 될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다음 소희'는 크게 말하면, 한 번 우연히 만난 적이 있던 소희(김시은)의 죽음 다음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유진(배두나)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보다 더 가까이로 다가가면, 2017년 1월 전주에서 실제로 일어난 현장 실습을 나간 여고생이 3개월 만에 스스로 저수지에 몸을 던진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다. 소희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정주리 감독은 영화 '도희야'(2014)년 이후, 무려 9년 만에 영화 '다음 소희'로 대중과 만나게 됐다. 두 작품 모두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돼 호평을 받았으니, 정주리 감독은 자신의 모든 장편 필모그래피 속 작품을 칸 국제영화제를 비롯한 해외영화제에서 수상과 호평을 받은 셈이다. 그런데 두 작품 사이의 9년 동안 그에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두 작품 모두 정주리 감독과 함께한 배우 배두나는 그에 대해 "고지식하고, 정도를 걷고, 그 길을 지키고 싶어하고, 연민이 있는 착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런 정주리 감독과 영화 '다음 소희'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사진 : 영화 '도희야'와 '다음 소희' 포스터
Q. '도희야'에 이어 '다음 소희'로 돌아왔다. 두 작품 모두 사회의 양지보다는 음지로 포커싱을 향하는 작품이다. 이 소재를 꼭 영화화해야 했던 이유가 있을까.
"비극적인 죽음이 있고, 그다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실제 사건이 있고 난 뒤, 한참이 흐른 후에 이 영화의 제안을 받았다. 제가 알지 못했던 이 이야기가 저를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그 힘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 죽음이 하나가 아니라, 그전에도 비슷한 죽음이 있었고, 그 이후에도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지만, 비슷한 죽음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안타까운 죽음이 발생했는데 제대로 애도 되거나,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그 죽음을 반성하기보다 더 비참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다음의 이야기를."
Q. 유독 '다음 소희'의 주인공들은 펀치를 날린다. 앞서 말한 이야기와 연결해 소희(김시은) 다음에 나오는 유진(배두나)이 느낀 '분노'의 감정이었나.
"펀치는 아주 단순한 의미다. 그 말을 하는 입을 때리고 싶었다. 영화니까 가능한 거지 않나. 나라면 절대 못 했을 일을 주인공에게 담은 것도 있다.(웃음) 분노라면 소희의 이야기만 하고 끝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분노가 아니라 사실 더 가까운 표현을 찾자면 '좌절'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 돌아볼 때, '내가 왜 이렇게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지?, 나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느끼고 있었지?'라는 저 자신에 대한 거리감이었다. 그 거리감의 정체는 뭘까. 그런 것들이 혼재돼 후반부 유진의 이야기까지 하고 싶었던 계기가 된 것 같다."
영화 '다음 소희' 스틸컷 / 사진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Q. '도희야'에 이어 '다음 소희'까지 특정인의 이름이 영화의 제목이 된 이유가 있을까.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도희와 소희가 자매같이 돌림자 '희'를 쓰는 듯하다.
"첫 영화도 이번 작품도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초창기에 제목이 함께 떠올랐다. '도희야'는 도희라는 아이를 불러주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되길 바라며 만들어졌다. 제목이 주제를 담고 있기도 하다. 이번 영화도 '소희'라는 아이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소희 다음에 올 친구, 소희 다음에 등장하는 유진, 등 얼개가 잡혀간 것 같다. 두 친구의 이름이 비슷한 것은 100% 우연이다. 도희는 중학교 때 친구 이름을 가지고 왔고, 소희는 권여선 작가님의 단편 소설 '손톱' 속 주인공 이름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손톱' 속 소희는 대형마트 창구에서 수납하는 일을 한다. 그 주인공을 굉장히 잘 묘사했다. 그게 계속 저에게 남아있었는데, 이 작품을 생각하며 자연스레 '소희'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허락을 맡지는 않았는데. (웃음)"
Q. '다음 소희'에서 큰 모티브는 춤이 아닐까 싶다. 소희(김시은)이 춤을 추다 실패하는 모습으로 시작하고, 두 사람이 만나는 곳도 춤 연습실이지 않나. 이유가 있을까.
"두 주인공이 한 번 스쳤던 곳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춤추는 곳, 연습실이어야 했다. 처음 소희가 춤을 좋아하는 아이라고 자리를 잡았고, 유진도 느슨하게 비슷한 구석이 있으면서도 관객들이 보기에 궁금증을 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다. '배두나가 처음 저렇게 등장하다니'라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나름 재미있었다. 거기에 뭔가가 있다고 묘사하고 싶지 않았고, 말 그대로 스쳐 지나간 적이 있는 것."
영화 '다음 소희' 스틸컷 / 사진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Q. 장르를 힙합으로 한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소희가 연습한 곡이 곡명은 나오지 않았는데, 배우 김시은에게 인터뷰 당시 물어보니 그레이와 로꼬의 곡 '꿈이 뭐야'라고 하더라. 곡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
"한참 시나리오를 쓸 때, '스트릿 우먼 파이터'가 한참 유행하고 있었다. 저도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너무 멋있다고 생각했다. 여러 장르가 있는데 그중에 힙합 장르가 저에게 제일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너무 멋있었다. 예쁘고 아름답다기보다, 힘이 있고 분노도 느껴졌다. 힙합 음악 자체가 그렇기도 하다.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 힙합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 출연한 댄서가 '꿈이 뭐야'에 맞춰 선보인 안무 영상을 보게 됐다. 그 후에 그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들어봤다. 가사도 그렇고, 희한하게 맞아떨어지는 것도 있고, 너무 잘됐다 싶었다."
Q. '다음 소희'에서 '눈'은 중요한 순간마다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눈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나.
"나름 의미를 둔 거긴 하다. 눈이 올 때는 포근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따뜻한 느낌까지 든다. 그런데 눈이 한참 오고, 쌓이고, 그 후에 녹을 때는 굉장히 지저분하고 심지어 더러워지지 않나. 눈이 녹은 후 모습은 처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대비가 '눈'에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 소희'를 보면, 눈이 올 때는 되게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눈이 내린 다음에는 반드시 안 좋은 일들이 벌어지는 그런 대비를 두고 싶었다."
영화 '다음 소희' 현장 스틸컷 / 사진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Q. 소희가 앉았던 가맥집에 앉게 되는 유진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리고 문틈을 통해 발끝에 닿은 햇살도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해당 장면에 담고 싶었던 감독님의 의도가 있을까.
"햇살이 발에 닿게 한 장면은 영화 내내 침울하고, 차갑고, 잿빛의 어두운 톤으로 가다가 그래도 마지막에는 이날의 마지막 햇빛이 닿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무는 해니까, 그게 잠깐 비추다가 사라져버릴 햇빛이고, 그 아이 발에 닿는데 무슨 기분이 들까. 그조차도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을까. 아니면 살짝 따뜻함을 느꼈을까. 그런 것들을 저 자신도 헤아려보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어떻게 보면 대비가 되어 따사로워 보일 수도 있는데, 그리고 나서 굉장히 차가운 곳으로, 고립된 곳으로 가니까. 잠깐의 그 햇빛이 굉장한 감흥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Q. 김시은 배우는 '다음 소희'의 1막을 여는 중요한 위치였다. 그런데 오디션이 아니라, 처음 본 오디션에서 확정을 지었다더라. 어떤 믿음이 있었나.
"저는 사실 오디션 자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김시은 배우와 만났다. 실제로는 엄청난 오디션을 할 각오도 하고 있었다. 스타트 같은 자리라고 생각했다.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데, 김시은이 '다음 소희' 시나리오를 본 첫 소감으로 '소희가 꼭 세상에 나왔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 말이 저에게는 특별했다. 오래전에 '도희야'라는 작품의 시나리오를 쓰고 배두나에게 시나리오를 보냈는데, 워쇼스키 남매와 작업 중이었던 배두나가 저에게 '하겠다'라고 답했다. 이후에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하면서 '어떵게 단번에 하겠다고 했냐'라고 물어봤었다. 그때 들었던 답이 '이 영화가 꼭 세상에 나와야 한다'였다. 그 말이 그래서 제 귀에 확 박힌 것도 있다. 담담하게 일상 이야기를 하고, 친구들을 이야기하는 김시은을 보며, 내가 생각한 소희를 만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영화 '다음 소희' 현장 스틸컷 / 사진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Q. 어떻게 보면 배두나가 김시은 캐스팅에도 강한 동력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유진은 왜 배두나여야 했을까.
" 처음부터 '다음 소희'를 1, 2부로 나누고, 주인공이 바뀌는 구성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배두나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연기할 유진을 떠올리며 인물을 만든 것도 있고, 기대감도 있었다. 그 덕분에 온전히 이 시나리오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캐스팅 될 거라는 보장도 없었는데, 이 존재가 있어서 완성할 수 있었고, 당연히 생각하면서 쓴 인물인 배두나에게 시나리오를 보냈고, 너무나 고맙게도 '하겠다'라는 답을 들었다. 정말 걱정을 많이 했었다. 밤에 이메일을 보내놓고 밤새 바들바들했다. '하겠다'고 해줘서 너무 다행이었다. 시나리오를 보내고 주변에서 걱정을 많이 했다. 이런 형식이 낯선 형식이니까. 그런데 저는 '배두나는 알아봐 줄 거야'라는 믿음이 있었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니 정말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힘을 받았다."
Q. '도희야'(2014) 이후, 무려 9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차기작이 늦어진 이유가 있을까.
"영화는 자본이 있어야 만들 수 있는데, '도희야' 끝내고 꼭 만들고 싶은 작품이 있어서 오랫동안 시나리오를 작업했다. 마치자마자 투자사를 찾아 나섰는데,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면서 제작이 끝내 불발됐다. 그 과정에서 3년의 세월이 흘렀다. 저는 제가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드니 한 작품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다. 사실 연출 제안도 받고, 기존 시나리오를 각색해보자는 제안도 받았다. 심지어 제가 관심가는 프로젝트도 있었다. 그런데 끝내 도장을 찍지 못한 이유는 결국 '내가 제대로 잘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었다. 온전하게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걸로 만들고 싶다."
영화 '다음 소희'를 연출한 정주리 감독 / 사진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Q. '도희야'에 이어 '다음 소희'까지 모두 칸 국제영화제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자신의 전 작품을 모두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호평받은 느낌은 어떤가.
"우선 영화제 측에 너무 감사하다. 오래전에 첫 작품 '도희야'를 선정해주신 것도 저에겐 과한 일이었는데, 그동안 잊지 않고 기억해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다음 소희'를 출품할 때는 편집본도 완성되어있지 않아서, 지금보다 분량도 길고, 후반 작업도 안 돼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눈이 CG(컴퓨터 그래픽)로 완성된 장면인데, 출품할 때는 완성이 되지 않아 해당 장면에 (눈 CG)라고 글을 써 놓았을 정도였다. 그래도 완성이 되면 어떤 모습 일거라고 예상하신 바가 있으신 것 같다. 그래서 너무 감사하다."
Q. 지금도 어른들로 인해 현재의 아이들이, 청춘들이, '다음 소희'들의 고된 나날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2023년 우리나라 관객에게 '다음 소희'가 어떤 의미로 남길 바라나.
"제가 지난 해 11월 2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사실 상영을 그 직전에 했다. 상영을 하는 것을 보고, 빨리 서울로 돌아왔다. 그런데 상을 받으러 다시 오라더라. 아니면 소감을 찍은 영상이라도 보내달라고. 그런데, 영상으로 도저히 아무 말도 할 수 없더라. 그래서 다시 갔다. 제가 그곳에서 '상을 주신 분들에게 감사하고, 소희와 유진을 오롯이 연기해 준 두 배우에게 영광을 돌린다'라고 소감을 전하면서 '지금 우리나라에 닥친 슬픔이 너무나 커서, 사실 참담한 기분으로 영화제 기간 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이 영화에 공감해주시고, 슬픔을 이해해주셨다. 영화는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것 같다는 응원을 느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런 의미입니다. 구체적으로 살아있던 사람이고, 빛났던 친구였던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지만, 영화 속에서는 살아남아 '다음 소희'를 본 관객 마음속에 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참고로 지난해 10월 29일에 서울 이태원 한 골목에 수많은 인파가 몰리며 압사 사고가 벌어져 159명이 목숨을 잃었다. 정주리 감독은 그 일이 벌어지고 4일 후에 참석해야 했던 도쿄 국제영화제의 기억을 약 한 시간 동안 이어진 인터뷰의 마지막 이야기로 꺼내며 진심을 보였다. '다음 소희'는 더 이상 세상에 나타나지 않기를, 사람이 자신만의 빛을 내며 살기를, 정주리 감독의 진심이 관객에게 닿기를 마음으로 바래본다.
화 '다음 소희' 스페셜 포스터 / 사진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Copyright ⓒ 디지틀조선일보 - 디지틀조선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