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29일 전 씨가 타고 있던 볼보 S60 차량이 판교 청소년수련관 국기게양대를 들이받고 멈춰 섰다./제보자 제공
볼보자동차 S60의 급발진 추정사고와 관련한 소송이 초유의 '최첨단 기술 검증전'으로 번질 전망이다. 재판부가 급발진 여부를 가릴 수 있는 다양한 기술 감정 신청을 채택하며 진실 규명에 대한 의지를 보인 것이다.
차량 결함과 결부된 민사재판에서 재판부의 증거 감정 신청 채택률은 낮은 상황이라 법조계서도 이번 소송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재판부가 볼보의 화려한 변호인인 '김앤장' 주장 외 객관적 기술 검증을 통해 원고의 목소리도 적극적으로 반영하면서 형평성 있는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25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5부(최규연 부장판사)는 지난 23일 볼보 S60 T5 차량(2020년식) 운전자 전모 씨(51)와 가족 3명이 볼보자동차코리아와 이윤모 대표, 판매사 에이치모터스 황호진 대표를 상대로 낸 2억 원대 손해배상 청구소송의 감정기일을 진행했다.
이날 재판부는 원고가 낸 감정신청 5건을 모두 통과시켰다. ▲블랙박스(영상) ▲블랙박스(음향) ▲운행 데이터 장치인 ASDM(Active Safety Domain Master) ▲사고조사기록장치인 EDR(Event Data Recorder) ▲작동장치(오토홀드·가속 및 브레이크 페달·도로표지인식기능) 등이다.
볼보의 기술을 두고 자동차 제조사가 아닌 일반 소비자인 운전자가 기술 검증에 나서는 이유는 현행법 체계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차량 사고가 자동차의 결함으로 발생했다는 것은 소비자가 먼저 입증해야 한다.
그간 자동차 제조사는 운전자의 과실로 발생했을 가능성을 집중 제기하면서 소비자가 신청하는 기술 감정에 대해 반대 의견으로 맞섰다. '영상 자료에서 브레이크등이 안들어왔다', 'EDR에서 가속페달을 밟았다는 기록이 있다'라며 추가 조사는 불필요하다고 일방통행 하는 형태가 다수였다. 많은 경우 제조사의 이런 주장이 받아들여져 일반 소비자는 제대로된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물러서고 만다. 급발진 관련 소송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때 흥미로운 점은 볼보 사건을 맡은 재판부가 다양한 기술에 대한 증거 감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사실이다. 올 7월부터 시작된 수 차례의 재판에서 김앤장은 줄곧 '이미 국과수 조사가 이뤄졌다'라며 증거 조사에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이번 볼보 급발진 소송이 최첨단 기술전이 된 이유는 재판부가 신기술 감정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사고 차량과 똑같은 모델을 법원 주차장으로 끌고 와 직접 살펴보겠다고 할 정도로 급발진의 원인을 다층적으로 들여다보려고 한다.
볼보코리아 측은 줄곧 '운행데이터 추출 장치(ASDM)가 국내에는 없다', '이 장치는 스웨덴 본사에 보내야 한다' 등의 주장을 펼쳤다. 이에 재판부가 직접 나서 국내 검증 기관까지 발굴해냈다. 한국 차량기술사회로부터 감정실시에 대한 확답을 받고 감정을 진행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자동차 전자제어 기술은 볼보측 주장과 달리 한국이 우위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첨단주행자보조장치(ADAS) 등의 작동 데이터가 담긴 ASDM 데이터를 검증하는 건 급발진 관련 소송뿐만아니라 자율주행 레벨2 차량과 관련해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이다. ASDM 분석을 통해 ADAS로 총칭되는 도로표지인식기능, 자동속도제한장치, 자동긴급제동장치, 자동긴급조향장치 등이 급발진 과정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살피는 게 이번 소송의 핵심이다. 더욱이 이번 재판부는 볼보코리아 측이 스웨덴에 가야한다 등의 핑계를 대면서 숨겼던 ASDM의 세부사항에 대해 공식적으로 밝혀야 한다고 명령했다.
과거에는 급발진 소송이 단순히 '운전자가 엑셀이나 브레이크를 밟았냐'를 두고 대립하는 단순한 논리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자동차의 전자 제어장치 등이 개입하면서 이번 재판부는 기술검증으로 충분히 다툼의 여지를 들여다 봐준다는 측면에서 수입차 판매사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또 재판부는 자동차 충돌 전 5초 동안의 가속·제동 데이터인 EDR 자료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원고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김필수 대림대학교 교수는 "EDR에는 가속페달을 밟은 것으로 나와도 실제 주행 상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며 "오류가 많은 EDR 자료가 객관적인 자료로 여겨져 자동차 브랜드사의 '면죄부'가 되는 관행이 없어져야 한다"며 이번 재판부의 EDR 증거 조사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