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부품 조차도 구하기 힘든 자동차의 불모지 한국에서 자동차산업을 꿈꾸고 실현 가능케 이끈 정주영 명예회장이 포니엑셀을 지켜보고 기뻐하고 있다./현대차그룹 제공.
현대그룹 창업주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불가능하다고, 해보기는 해봤어?”로 대변되는 돌관정신(突貫精神)이 자동차의 불모지 한국을 세계 5위권 자동차생산국으로 만들었다. 정주영 선대회장이 세계를 놀라게했던 포니를 만들게 된 배경이, 포니를 디자인했던 디자인 거장의 회고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 오른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말한 유럽식 표현의 스피드정신이 바로 현재의 현대그룹과 현대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등 방계기업들을 세계적 기업으로 육성시킨 돌관정신이다.
고 정 명예회장이 창업이념으로 삼았던 돌관정신은 어떤 장애물이 가로막아도 목표를 향해 흔들리지 않고 돌진해 이뤄내는 정신이다.
24일 현대자동차 인재개발원에서 만난 백발의 '마에스트로'는 50년전 그날을 생생히 기억하며 정주영 창업주의 돌관정신에 대해 회고했다.
1973년 말, 정주영 선대회장은 이탈리아 토리아노에 직접 방문했다. 지금은 자동차 디자인의 아버지가 된 조르제토 주지아로에게 현대차의 디자인을 맡기기 위해서다. 그렇게 탄생한 게 현대차의 첫 독자모델인 '포니'다.
포니의 탄생은 기적이었다. 당시 '자동차 불모지'였던 한국은 자동차 부품을 찾기도 어려웠을 만큼 생산 기반이 갖춰지지 않았다. 1973년 '포니프로젝트' 시작 후 반년 만에 프로토타입(시제품)이 나왔다. 양산까지는 2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현재도 콘셉트카, 프로토타입을 거쳐 양산에 이르기 까지는 족히 2년이 넘게 걸린다.
정주영 선대회장의 '간절함'이 낳은 결과다. 자동차를 국가의 중추 수출산업으로 육성해 국민들의 더 나은 삶을 염원했던 게 정주영 선대회장의 수출보국 정신이다. 주지아로는 "현대차가 포니를 위해 울산에서 큰 배를 만드는 등 열정이 대단했다"며 "콘크리트 바닥도 없던 울산 공장에서 아이오닉5를 만들다니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이날 주지아로와 '디자인 토크 행사'에 참석한 현대차그룹 CCO(Chief Creative Officer) 루크 동커볼케 부사장과 현대디자인센터장 이상엽 부사장은 포니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현대 스피드' 정신이 존재한다고 언급했다. 이는 불필요한 의사 결정 과정을 줄인 정주영 선대회장의 '철학'에서 시작된다. 주지아로는 "한국에 필요한 일이 뭔지 알고, 기적을 만들어 낸 정주영 선대회장은 천재다"라고 평가했다.
디자인과 엔지니어링은 애증의 '커플'로도 묘사된다. 예술의 영역이 기술과 괴리를 보이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자동차 라이트의 경우 규제와 기술적인 한계 때문에 콘셉트카에 담겼던 디자이너의 의도가 양산 단계에서는 좌초되는 일이 많다.
하지만 포니 프로젝트만큼은 달랐다. 주지아로에게 디자인과 엔지니어링 전반의 설계까지 맡겨 불필요한 의사 결정 과정을 줄였다. 직접 용접을 할만큼 자동차 기술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던 주지아로는 디자이너이자 '기술자'였다.
이런 포니 프로젝트에서 '비운의 영웅'도 탄생했다. 1974년 토리노 오토쇼에서 함께 공개된 '포니 쿠페 콘셉트'다. 포니 쿠페 콘셉트는 쐐기 모양의 노즈와 원형의 헤드램프, 종이접기를 연상케 하는 기하학적 선으로 전세계 자동차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포니 쿠페 콘셉트는 양산에 이르지 못하고 유실됐다. 동커볼케 부사장은 "우리도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이미지와 드로잉 자료는 남아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현대차는 내년 초 다시 돌아온 포니 쿠페 콘셉트를 공개할 예정이다. 현대차가 복원에 나선 이유는 '뿌리 찾기'를 위해서다. 현대차 디자인의 아이콘을 꼽자면 현대차 디자인에 영향을 미친 포니 쿠페 콘셉트가 적격이라는 판단에서다.
올해 7월 처음 공개돼 전세계 미디어와 고객으로부터 호평을 받은 고성능 수소 하이브리드 롤링랩(Rolling Lab) 'N 비전 74'는 포니 쿠페 콘셉트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됐다.
더욱이 주지아로는 영화 '백 투 더 퓨처'에 등장하는 '드로리안 DMC 12'를 디자인하면서 포니 쿠페를 기반으로 완성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연필 노동자'로 낮춘 주지아로는 현대차의 기술력 때문에 포니, 스텔라, 엑셀과 같은 베스트셀러 자동차가 탄생했다고 말했다.
이는 그의 자동차 디자인 철학과 이어진다. 현실이 전제된 창의성이 바탕이 돼야 한다는 게 주지아로의 지론이다. 자동차는 인간과 안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에 디자이너 역시 자동차 공학에 대해서도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또 모두가 탈 수 있는 차를 위해서는 '경제성'을 강조했다. 단가를 위해 포기했던 둥근 헤드 라이트가 '각진 눈'이라는 포니의 시그니처가 되기도 했다.
디자인 토크 행사에서 조르제토 주지아로 디자이너(가운데)가 현대차그룹 CCO 루크 동커볼케부사장(왼쪽)과 현대디자인센터장 이상엽 부사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김혜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