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 5월 한국을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현대차그룹 제공
미 정부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따라 현대자동차가 위기에 처한 상황이다. 현대차의 ‘14조 원’투자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인센티브, 세제혜택 등 화답하는 뉘앙스로 “현대차 실망시키는 일 없을 것”이라고 답해서 미국과의 윈윈 전략이 기대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결과는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자기 보따리 내놔라’고 위협하는 꼴이다. 이같은 해석이 나오는 것은 바이든이 미국내에서 지지율이 하락세를 타고 있을 당시 한국에서 투자를 이끌어내면서 지지율이 반등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때 서로 윈윈하는 것이 통상적인 관례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외교적 결례’가 아니냐는 지적이 흘러나오고 있다.
미국 정부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시행에 따라 전기차 보조금 대상에서 한국산을 배제하기로 하면서 현대자동차그룹의 미국 시장 전략에 적신호가 켜졌다. 현대차와 기아는 IRA 여파로 내년에만 7만 대의 판매 손실을 볼 것이란 추정치가 나오는 등 재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22일 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 아이오닉5와 기아 EV6 등은 그룹의 주력 차종이 미국에서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는 21개 차종에서 제외됐다. 지난 16일(현지시간)부터 IRA에 따라 북미에서 생산된 전기차만 보조금을 받게 되면서부터다. 이항구 한국자동차연구원 연구위원은 “상반기 판매량을 기준(약 3만3000대)으로 할 때 올해 남은기간까지 3만5000대 손실이 예상된다”며 “전기차 보조금 이슈가 장기화할 경우 내년에는 총 7만 대이상의 판매 손실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바이든의 배신’이라는 격양된 목소리가 나온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5월 한국을 방문해 정의선 회장을 만나 투자 약속을 받아내면서 “ 현대차를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말했다. 당시 자리에서 정 회장은 미국에 2025년까지 105억 달러(약 14조 원)를 투자하겠다”고 말했다.
현대차의 이러한 투자 약속은 외교적인 압박에서 나왔다는 관측이 우세했다. 당시 지지율이 30%대까지 떨어진 바이든 대통령은 11월 중간 선거를 앞두고 반등의 기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차를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발언은 빈말이 돼 버렸다. 업계 관계자는 “일국의 대통령이 본인의 한말을 3개월만에 뒤집을 수 있냐. 미국과 영국의 언론들이 바이든의 치매설을 괜히 내 놓는 것이 아니다”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핵심은 한국산을 미국산으로 인정하는 효과가 나오는 것인데, 이를 반영하지 않았다는 건 심각한 외교적인 결례”라고 꼬집었다.
올해 상반기 현대차그룹은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 테슬라(70.1%)에 이어 점유율 2위(9%)다. 3위는 포드로 점유율 6.2%다. 전기차는 가격이 비싸 보조금에 따라 성패가 좌우된다. 더욱이 포드와 GM과의 격차가 크지 않은 상황에서 가격 경쟁력을 잃은 현대차가 한 번 승기를 놓치면 회복이 불가능해질수 있다.
2025년 미국 조지아주에 전기차 전용 공장을 구축하기로 현대차가 한 완공 시점을 6개월 앞당긴다는 얘기가 업계 안팎에서 나온다. 조기 완공에 총력을 다한다고 해도 아직은 먼 얘기이기 때문에 기존 앨라배마 공장에서 혼류생산을 하는 방안이 대안으로 나온다. 이는 생산라인에서 2개 이상의 제품을 생산하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이도 녹록지 않다. 현대차그룹과 동반 진출한 국내 부품 기업들이 당장 전기차 부품을 생산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항구 위원은 “현대차와 동반진출한 1차 기업과 그 외 업체들을 포함하면 200개 정도가 되는데, 내연기관 물량을 전기차로 전환하면 이들에게도 위기”라며 “현대차가 외국 업체들과 거래를 새로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원가 부담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이 어려운 만큼 전문가들은 우리 정부가 전방위적인 외교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현재 우리 정부는 외교부 등이 나서서 IRA가 FTA 원칙과 세계무역기구(WTO) 규범에 위반될 소지가 있다며 미국 측에 우려를 전달하고 있다.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박진 외교부 장관은 이번 사태와 관련해 지난 19일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 통화하는 과정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대한 한국의 우려 사항을 전달했다.
박 장관은 이날 통화에서 한국 업계가 우려하고 있다는 점을 거론하고 유연한 이행을 바란다는 뜻을 전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의 우려를 외교당국 최고 책임자 선에서 직접 전달한 것이어서 향후 귀추가 주목된다.
다만 ‘WTO 위반’ 카드는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다. 통상 무역분쟁을 제소할 경우 재판에 최소 4~5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2018년 한미 FTA 개정 당시 한국의 양보로 미국산 자동차 물량을 늘려주는 협상을 한 것을 상기시켜서 미국 정부에 항의해야 한다”며 “한국 경제 위축이 국가 안보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도 강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 5월 한국을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현대차그룹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