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일 인터뷰 /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지금의 현실도 시간이 지나면 역사가 되잖아요. 우리는 어려운 시대를 잊지 말자고 하는데, 이 영화도 그런 마음을 담아서 만든 작품이에요. 왜 지금 이순신인지를 물어보신다면, 한 인물을 두고 이야기할 것이 너무 많고, 되새겨야 할 것들이 정말 많은 인물이라는 거죠."
박해일이 지혜로운 장수, '이순신'으로 분했다. 활과 붓, 두 가지를 유연하게 오가며 박해일만의 이순신을 완성했다.
영화 '한산: 용의 출현'(감독 김한민, 이하 '한산')은 명량해전 5년 전, 진군 중인 왜군을 상대로 조선을 지키기 위해 필사의 전략과 패기로 뭉친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의 한산해전을 그린 전쟁 액션 대작. 극 중 박해일은 40대 후반의 '이순신' 장군을 연기했다.
이미 김한민 감독과 두 작품을 함께 한 박해일은 김 감독이 제안한 '이순신'에 매료됐다. 기개 높은 장수로서의 이순신보다는 지략가로서의, 내적 에너지가 강한 이순신을 세상에 선보일 수 있는 기회였다. 김한민 감독은 기존 우리가 알던 이순신과 다른 결의 이순신을 보여줄 수 있는 배우는 박해일뿐이라고 말했고, 박해일은 부담감을 안고 이순신의 옷을 입었다.
"시대마다 이순신의 느낌이 조금씩 다른 것 같아요. 보통은 장수로서의 면모를 다룬 경우가 많은데, 저는 이번 '한산'에서 무인이긴 하지만 붓도 잘 어울리는 군자스러운 무인을 동시에 보여드리면 어떨까 싶었어요. 그래서 조금 더 차분하게 이 캐릭터를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런 점에서 다른 작품 속 이순신과 선을 달리하게 된 계기가 됐어요."
"제가 알아본 바로는 이순신 장군님은 희로애락이라는 감정이 얼굴에 잘 드러나지 않는 분이라고 하더라고요. 마지막까지 침착하게 명령을 하더라도 시의적절할 때를 기다리시잖아요. 그런 부분을 가져가려고 했죠."
박해일은 '명량'의 최민식에게 배턴을 넘겨받았다. '한산'이 '명량'의 프리퀄로 진행되지만, 전작의 큰 흥행이 있던지라 배우로서도 캐릭터를 잡아가는 데 부담이 있었을 터다. 박해일은 김한민 감독의 한마디 덕에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온전히 박해일만의 이순신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감독님께서 '너는 최민식 선배님 같은 용맹스러운 장군 느낌은 아니다' 그렇게 못을 박아주시니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하하. 그런데 시나리오를 읽어보면 젊은 지략가로서의 이순신이 담겨 있거든요. 감독님이 '지혜롭게 수군들과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고 하시면서 '그 부분이 너랑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한마디를 해주셨어요."
"붓과 활이 잘 어울리는 캐릭터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감독님과 함께했고, '최종병기 활' 때의 경험이 '한산'의 이순신으로 태어나는 것에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죠."
박해일의 이순신은 말이 별로 없다. 바다처럼 고요하지만 거칠게 휘몰아칠 땐 폭발하는 에너지가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대사가 적다는 건 관객을 설득할 가장 주요한 요소를 잃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 빈 곳을 다른 표현으로 채워야 하기 때문에 배우로서도 큰 부담이다. 그런 이유로 박해일 역시 '한산' 작업이 배우로서 도전이자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많은 분들이 '이번엔 대사가 많이 없구나' 하시더라고요. 근데 맞아요. (웃음) 배우가 일차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해야 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대사거든요. 그런데 이번엔 좀 대사만큼 중요한 감정을 담아서 눈빛으로 실어 보내야 했어요. 호흡이라던가, 가만히 서 있는 것 자체로도 하나의 대사구나라는 생각으로 표현하려고 했고요. 그 부분이 적응하는데 쉽지 않았죠."
"전투의 상황에서도 이순신이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어딘가에 그림자처럼 이순신의 기운이 남아 있는 그런 임팩트를 드리고 싶었어요. 한 번에 기운을 응축해서 전달해야 했기 때문에 제 딴에는 더 깊이 있는 방식의 연기를 해볼 수 있었어요."
김한민 감독의 바람으로, '한산' 촬영은 실제 1592년 한산도 대첩이 벌어진 한여름 쯤 시작됐다. 갑옷만 20여 kg, 투구에 검까지 하면 족히 30kg은 되는 장비를 입어야 했다. 무더위에 육체적 힘듦까지 견뎌야 했다. 하지만 박해일은 현장에서 묵묵히 땀 흘려주는 이들 앞에선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만큼 현장을 아우를 줄 아는 배우였다.
"사실 날씨와 육체적인 힘듦은 기본이었어요. 저도 힘들었지만, 모든 스태프분들, 또 어떤 장면에서는 2~3백 명의 의병으로 나온 단역 분들이 계시거든요. 더운 와중에도 처참하게 죽어가는 장면을 연기해야 하는 분들과 찍다 보면 '내가 힘든 건 힘든 것도 아니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어요. 사실 저는 거의 가만히 서서 있거든요. 이렇게 촬영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과연 내가 맡은 역할의 존재감을 유지해나가고 있는가, 그 심정과 마음이 들어서 저는 매 순간 끝날 때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작품보다 그런 마음이 더 컸던 거죠."
김한민 감독은 '한산'에 이어 이순신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할 '노량'까지 모두 촬영을 마쳤다. '명량'과 '노량'의 교두보 역할이기도 한 '한산'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 없다. '명량'의 대승 기운을 이어받아 '노량'까지 이끌어야 하는 중요한 위치였다. 앞선 기자간담회에서 '선배 이순신' 최민식에게 "고생 좀 해봐라"라는 말을 들었다고 말한 박해일이 '후임 이순신' 김윤석에겐 어떤 말을 전하고 싶을지 궁금했다.
"제가 김윤석 선배님께 드릴 말씀은 없죠. 하하하. '노량'은 겨울에 하는 전투가 있다 보니 고생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촬영하는 현장 안에서 모든 기운을 소진하셨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그러다 보니 그냥 건강만 잘 챙기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죠."
"촬영을 마치고 나서 어쨌든 장군님의 기운을 털어내야 하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배우마다 한 작품을 하고 나서 캐릭터를 터는 방법이 다양할 텐데, 최민식 선배님이나 김윤석 선배님 또한 촬영을 마치신 후에 어떤 식으로 캐릭터를 떠나보내셨을지 궁금하더라고요."
박해일은 최근 영화계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배우 중 하나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과 김한민 감독의 '한산'으로 동시에 관객을 만나고 있다. 대세 행보를 맞이한 소감을 묻는 말에 박해일은 "그냥 제가 때를 잘 만난 것 같다"고 웃어 보였다. "어릴 때 장군감이라는 소리도 못 들어본 제가 지금 장군 역할을 하다니 감회가 새롭다"고 미소를 지은 그다. 박해일은 이 시대 이순신의 존재가 갖는 의미를 강조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관객분들께서 정말 '이순신이 이 시대에 갖는 의의'를 찾아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매 시기 우리는 이분의 작품을 문화적으로 다루고 기념하고 있잖아요. 시대에 따라 장군님의 기운을 보여주는 방식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항상 동일시되는 건 '화합' 같아요. 모든 국민에게 그런 의미를 주는 존재이신 거죠."
"우선 영화 '한산'을 보실 때는 그 자체를 즐기시면서 스트레스도 푸시고, 더위를 날리실 수 있는 액션 전투를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이순신 장군님의 비장함을 느끼고 가시면 좋겠다는 마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