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틀조선TV 유튜브 바로가기

故 이건희 회장 1주기…"신(新)경영, 스마트폰 세계 1위 주역"

김종훈 기자 ㅣ fun@chosun.com
등록 2021.10.25 15:04

'인재제일' 철학 바탕으로 '창의적 핵심인재' 양성에 힘써
반도체와 모바일 등 '세계 일류기업'의 토대 닦은 경영인 평가
삼성전자, 사내 게시판에 온라인 추모관 개설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조선DB

한국경제의 큰 획을 그은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1주기 추도식이 가족들만 참석한 채 조촐하게 열렸다.

25일 오전 10시 경기도 수원 선영에서 열린 추도식은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사위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 사장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통상 회사를 이끈 선대 경영자의 추도식은 경영정신을 기리기위해 계열사 사장단 등이 참석하는 등 대규모로 치러지지만 조용히 가족모임으로 치르는 것은 코로나19로 인해 방역에 모범을 보이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삼성 관계자는 "대규모 행사 대신 간소하고 소탈하게 하자는 유족들의 의지에 따라 가족들만 참석한 채 조용하게 진행됐다"고 전했다.

삼성은 이날 1주기를 맞아 경기도 용인시 소재 삼성인력개발원 창조관에 이건희 회장의 흉상을 제작, 설치했다. 이 부회장은 추도식 후 곧바로 삼성인력개발원으로 이동해 흉상 제막식에 참석했다. 제막식에는 이 부회장 이외에 사장단 5명만 참석했다.

삼성은 "생전에 '인재제일' 철학을 바탕으로 '창의적 핵심인재'를 양성하는데 힘써온 이건희 회장을 추모하기 위해 흉상을 설치했다"고 밝혔다.

삼성은 다만 흉상을 외부에 공개하지는 않았다.

삼성그룹은 이날 사내 블로그에 '온라인 추모관'도 개설했다.

또한 사내 게시판에는 '세상을 바꾼 거인, 고 이건희 회장님을 그리며'라는 제목으로 1주기 추모 영상과 신경영 특강 영상을 공개했다.

이건희 회장은 지난해 10월 25일 7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2014년 5월 용산구 이태원동 자택에서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입원 치료를 받은 지 6년 5개월 만이었다.

한국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한 고인은 부친인 이병철 삼성 창업주 별세 이후 1987년 삼성그룹 2대 회장에 오른 뒤 탁월한 경영 능력과 안목으로 반도체와 모바일 등 분야에서 '세계 일류기업'의 토대를 닦은 경영인으로 평가받는다. 1942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난 고인은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셋째 아들로, 일본에서 중학교를, 서울에서 서울사대부고를 졸업한 뒤 일본 와세다 대학과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수학했다. 1987년 12월 이병철 창업주 별세 이후 삼성그룹 2대 회장에 올라 삼성그룹을 이끌었다.

이건희 회장의 인생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파란만장했다. 그가 회장으로 취임했던 1987년 당시 1조원이던 시가총액을 2012년 390조원대로 40배나 성장시켰고 총자산 500조원대로 성장 시키는 성과를 일궈냈다.

삼성전자, 고 이건희 회장 1주기 추모영상 화면

◆이건희 회장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두 바꿔라"

1987년 11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가 타계하면서 그의 셋째 아들이 2대 회장에 올랐다. 이건희 회장 시대의 개막이었다. 이건희 회장 취임 후에도 삼성의 외형적 성장은 계속됐다. 하지만 주력회사인 삼성전자가 만들어 판매하는 제품은 글로벌 시장에서 여전히 ‘3류’ 취급을 받고 있었고, '질'보다 '외형'을 중시하는 관습에 빠져있었다.

삼성 경영진은 전년에 비해 얼마나 많이 생산하고 판매했는지 양적 목표에만 집중했다. 부가가치나 시너지, 장기적인 생존전략과 같은 요소는 소홀하게 취급했다.

이 회장은 1993년 2월 전자 관계사 주요 임원이 참석한 가운데 미국 LA에서 전자부문 수출 상품 현지비교 평가회의를 개최했다. 그는 현지 매장의 한쪽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놓여있는 삼성 제품들을 살펴본 뒤 "먼지 구덩이에 처박힌 것에다가 왜 삼성이라는 이름을 쓰는가. 이는 주주, 종업원, 국민, 나라를 기만하는 행위"라고 통탄했다

결국 1993년 6월 7일 임원과 해외주재원 등 200여명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켐핀스키 호텔에 불러모았다. 그는 이 자리에서 "삼성은 이제 양 위주의 의식, 체질, 제도, 관행에서 벗어나 질 위주로 철저히 변해야 한다"며 삼성그룹 '신(新)경영'을 선언했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두 바꿔라"라는 그의 유명한 발언도 이 자리에서 나왔다.

이건희 회장이 외친 신경영은 양 위주의 외형만 강조하는 경영 관습을 타파하고, 질을 중점적으로 챙기는 새로운 경영구조를 만들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는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도 불린다.

이후 이건희 회장은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신경영 문화를 삼성에 뿌리내리기 위해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그 과정에서 삼성 임직원들에게 심리적 충격을 가하는 일들도 종종 시도했다. '라인스톱제', '휴대폰 화형식'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라인스톱제란 생산현장에서 불량이 발생할 경우, 즉시 해당 생산라인의 가동을 중단하고 제조과정의 문제점을 완전히 해결한 다음 재가동함으로써 문제 재발을 방지하는 제도다. 라인스톱제를 가장 먼저 도입한 곳은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세탁기 생산라인이었고, 이후 모든 전자 관계사 사업장으로 확대됐다. 전자제품의 경우 1993년의 불량률이 전년도에 비해 적게는 30%, 많게는 50%까지 줄어들었다.

1995년 3월에 있었던 불량 무선전화기 화형식은 품질 사고 대책의 일환으로 수거된 불량 제품을 임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500억원어치의 전자제품을 불태워버린 사건이다.

당시 삼성전자의 무선전화기 사업부는 품질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완제품 생산을 추진하다 제품 불량률이 무려 11.8%까지 올라가는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고, 이 회장은 품질사고 대책과 향후 계획을 점검하면서 고객들에게는 사죄하는 마음으로 무조건 새 제품으로 교환해주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이와 함께 수거된 제품을 소각함으로써 임직원들의 불량의식도 함께 불태울 것을 제안했다. 15만대, 500억원 어치의 제품이 수거됐고 화형식을 통해 전량 폐기 처분됐다.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은 삼성전자가 초일류 기업으로 거듭나는 데 결정적인 원동력이 됐다고 평가된다. 2000년대 초중반 무렵만 해도 삼성전자가 글로벌 기업으로 불리는 게 어색하게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삼성전자는 단지 글로벌 기업 수준을 벗어나 세계 전자·정보기술 업계에서 명실상부한 리더로 평가되고 있다.

2004년에는 일본 10대 전자업체를 합친 것보다 많은 순이익을 냈다. 이후 10여 년에 걸쳐 스마트폰 분야까지 글로벌 선두 업체로 자리잡았다. 이후 애플의 아이폰을 필두로 스마트폰 시장이 폭발적으로 확대되자 삼성전자는 소위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 전략을 사용해 스마트폰 시장의 강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2007년에는 휴대폰 부문에서 모토로라를 누르고 세계 2위의 핸드폰 제조업체에 등재됐다.

2009년 스마트폰 시장에도 뛰어들어 갤럭시 라인업을 발표했으며, 스마트폰 시장에 뛰어든지 2년만인 2011년 3분기 스마트폰 세계 1위에 오른다. 삼성전자는, 2012년 부터, 노키아와 애플을 제치고, 전체 휴대전화 점유율 1위를 차지한다. 1992년 세계 최초 64M D램 개발을 시작으로 삼성은 반도체, 스마트폰, TV 등의 분야에서 글로벌 1위에 오르는 등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현재 삼성전자 브랜드 가치가 88조 원에 달해 세계 5위에 올랐다. 폴더블 스마트폰 등 혁신 제품을 만드는 첨단 기술 기업으로 글로벌 시장에 각인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글로벌 브랜드 컨설팅 전문업체 인터브랜드가 지난 20일 발표한 ‘글로벌 100대 브랜드’ 순위에서 삼성전자 브랜드 가치가 전년 대비 20% 성장한 746억 달러(87조9000억 원)라고 분석했다.


최신기사


    최신 뉴스 더보기


        많이 본 뉴스

          산업 최신 뉴스 더보기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