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던 날' 김혜수 인터뷰 / 사진: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강영호 작가 제공
"꿈이 거대하게 없어요. 어찌하다 보니 일을 오래 하게 됐고, 처음엔 제가 어떤 의식이나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이제는 성장을 했죠. 이 순간까지 왔기 때문에 일을 하는 김혜수와 사람 김혜수를 완벽히 분리하는 건 불가능해요. 현실적으로 주어진 순간 제 소임에 충실한 것밖에는 없어요"'화려한 톱스타', '대체불가 배우' 등의 수식어를 가진 김혜수가 이번엔 멋짐을 쏙 빼고 민낯에 가까운 모습으로 대중 앞에 섰다. 처음 '내가 죽던 날' 대본을 만난 순간부터 운명이란 걸 직감했다고 말한 그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마주 앉았다.
'내가 죽던 날'은 외딴섬 절벽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소녀, 그리고 그 소녀의 행적을 좇는 형사, 무언의 목격자까지, 살아남기 위해 각자의 선택을 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김혜수는 극 중 절벽 끝에서 사라진 소녀의 흔적을 추적하는 형사 '현수'로 분했다. 개인적인 아픔을 감내하고 있던 현수는 소녀 '세진'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 살아남기 위해 발악했던 순간에 공감한다. 그간 화려하고 고혹적인 매력을 발산한 김혜수는 이번 작품에서 피폐하고 처연한 모습으로 감성 드라마를 완성했다.
김혜수는 2년 전 '내가 죽던 날'을 처음 만난 그 순간과 감정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떤 장르인지, 무슨 내용인지 그녀에겐 중요치 않았다. 책에 적힌 '내가 죽던 날'이라는 글을 본 순간 형용할 수 없는 끌림을 느꼈다고 했다.
"작품을 처음 만난 게 '국가 부도의 날' 촬영이 다 끝나고 저한테 제안이 온 작품들을 검토할 때였어요. 침대 옆에 쌓여 있는 책 중에 제일 위에 '내가 죽던 날'이 있었어요. 제목부터 마음에 확 와닿았죠. 무슨 내용이고 장르인지도 전혀 모르는데, '어? 저 제목?' 이런 느낌이었어요. 살다 보면 누구나 원치 않은 힘든 상황을 겪게 되잖아요. 그럴 때 무언가 따뜻하고 묵직하게, 어디선가 위로를 전해준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이런 영화가 누군가에게, 모두에게 필요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죠"
김혜수는 책을 읽고 촬영을 하면서 작품의 메시지에 더 공감했다. 자신의 연기가, 우리의 작품이, 관객들에게 닿기를 바라며 작업에 임했다. 지난 기자간담회에서도 현수 캐릭터를 완성하기 위해 여러 아이디어를 제안했다고 했다. 그만큼 현수의 상황에 공감하려 했고, 자신을 녹여내려 했다. 그러다 보니 현수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 김혜수'도 자연스럽게 위로를 받았다. 스스로도 예측하지 못했던 위로였다.
"현수에 '나'라는 사람의 감정이 들어가야 하니까 많은 걸 거둬내려고 했어요. 화자인 현수가 무언가를 따라가고 결국 자신에 도달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 진실을 드러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실제 글을 따라가다 보면 왜 현수를 따라가게 됐고, 현수가 어디에 도달하는지 마음으로 느껴져요"
"('내가 죽던 날'은) 저에게 의미가 커요. 이 작품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가 그러했고, 그러기 위해 만난 사람들, 배우, 스태프들 간의 소통이나 따뜻한 연대감이 컸어요. 작품을 준비하고 좋은 배우를 만나면서 연기적으로 많이 느끼고 새로운 걸 경험하는 건 기대되는 부분이지만, 제가 그 이상의 감정을 느낄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그게 있었고, 그 힘이 컸고, 그 순간에 위로가 컸죠"
극 중 현수는 괜찮은 줄 알았던 자신의 인생이 한순간에 구렁텅이로 빠져버린 인물이다. 이 변화가 다가오는 동안, 본인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모르는 것도 잘못'이라는 생각이 현수의 뇌리를 가득 채웠다. 그런 현수에게는 쓴소리도 마다 않는 친구가 있다. 김선영 배우가 연기한 '민정'이다. 김혜수에게도 힘든 일이, 그럴 때 의지하는 사람이 있을까.
"저도 힘든 일이 있을 수가 있죠. 근데 저는 그냥 내버려 둬요. 그걸 막 이겨내려고 하지 않고, 외면하거나 무시하지도 않아요. 그때그때 제 흐름에 맞게 반응하는 대로 내버려둬요. 내버려두면 그 또한 지나가더라고요. 현실적으로 해결할 건 해결하고 거기까지인 건 거기까지 인 거고. 고민해야 하는 부분도 있고 의지도 있지만, 마음이 안 들 때는 내버려 둬요. 마음이 그러는 건 내가 정의하지 않아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힘들 때 힘들 걸 혼자 마음에 담아두거나 내버려 두거나 감당하려고 해요. 공유할 수 있는 정도만 오픈하려고 하죠. 저도 현수처럼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어떤 상처나 그런 것들이 완전히 회복될 수 있다면 세상이 정말 아름다울 텐데, 그렇지 못하잖아요. 저에게도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겨요"
중학생 때부터 시작해 데뷔 35년 차를 맞은 김혜수는 아직도 연기가 겁난다고 했다. "저에게 작품은 일이기 때문에 이걸 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가, 수행할 가능성이 있는가를 생각해요. 내가 배우로서 역부족이면 제가 고사하죠. 그렇다고 잘 할 수 있는 것만 하는 건 아니에요. 하기 전엔 다 겁나죠"라며 겸손해했다.
그러면서 "배우로서 느끼는 좌절감 같은 건 늘 있어요. 개인적으로도 크고 작은 좌절감이나 상처 같은 게 저도 있죠. 사람이라면 다 그렇잖아요. 저 역시 현수처럼 예기치 않게 그동안 제 인생들이 딱 부러진 것 같은 그런 감정을 느꼈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건 커리어의 문제가 아니라, 보여지는 나 말고, 정말 나 자체 '인간 김혜수'로서의 그런 시기가요"라며 자신의 나약한 부분도 열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