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틀조선일보 방송본부장 정상혁.
동네 하천을 따라 조깅을 하다 보면 구청에서 깔아놓은 자갈길이 나온다. 미관상 보기 좋고 발바닥 지압 효험도 누리라는 담당 공무원의 배려가 돋보인다. 근데 막상 이 길을 통과할 때면 굴곡이 심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속도를 조금 높이기라도 하면 발목을 삐기 십상이고, 자전거는 내려서 끌고 가야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자갈길 옆 잔디밭에 희뿌연 오솔길이 생겼다. 울퉁불퉁한 길을 불편해 한 사람들이 우회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샛길이다. 나는 이 길을 ‘민심로(民心路)’라 부른다. 정부가 정책을 만들면 국민들은 일단 따르고 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니다 싶으면 제 살 길을 찾아 나선다.
중국에는 ‘상유정책 하유대책(上有政策,下有对策)’이란 말이 있다. 중앙정부가 탁상공론의 정책을 하달하면 민초들은 꼼수를 부려 대책을 마련한다는 뜻이다. 접대로 낭비되는 공금을 줄이기 위해 요리 열 접시를 다섯 접시로 규제하면, 열 접시의 요리를 다섯 개의 큰 접시에 두 가지씩 담아 내오는 식이다. 한국은 중국과 다르다. 중국인들은 현체제 하에서 집권세력을 바꿀 방법이 없기 때문에 꼼수로 정책을 우회하지만 우리는 투표로 정권을 교체해 마음에 안 드는 정책을 없앨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3년 간 소주성, 탈원전, 부동산 규제, 대북 평화정책 등의 자갈길을 열심히 깔아왔다. 그 결과 지금 나라 경제엔 소득주도몰락의 조짐이 보이고, 집값은 서울의 경우 40%나 급등했다. 국내 원자력 기업들은 빈사 상태에 빠졌고, 그 자리를 중국 태양광 기업들이 꿰차 앉았다.
무엇보다도 이 정부가 가장 큰 치적으로 삼던 대북 평화정책엔 정작 평화가 사라지고 북을 향한 스토킹만 남았다. 코로나 방역에 대한 외신들의 칭찬도 지난 3년 간의 실책을 덮기엔 역부족이다. 이미 일부 눈치 빠른 여당 인사들은 자신들이 깔아놓은 울퉁불퉁한 자갈길 옆에 ‘민심로’가 생기고 있음을 눈치 챈 것 같다.
지난달 23일 더불어민주당은 177개 총선 공약을 발표하면서 ‘소주성’과 ‘탈원전’이란 단어를 슬쩍 뺐다. 지난 5일에는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공동 상임선대위원장이 나서서 종부세 완화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 정책들을 유지했다간 표를 깍아먹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여당에 이 정책들을 포기했는지 물어보면 아니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국민을 상대로 한 기만행위다. 기존 정책에 문제가 없다면 이번에도 당당하게 내세워 선거로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 아니면 실책을 솔직히 인정하고 정책 전환을 선언해야 옳다.
이번 총선은 20% 부동층 표심의 향방을 몰라 아직도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다. 여기에 4~8% 샤이(shy) 보수층과 전체 투표율까지 고려하면 더욱 오리무중이다. 여당의 잇단 실책에도 불구하고 선거가 백중세인 이유는 야당의 잘못도 크다. 그동안 그들은 여당의 실책을 촌철살인 지적하지 못했고, 프레임 전쟁에서 번번이 밀렸다.
그러나 야당의 부족함이 여당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이번 선거에서 집권세력의 실책에 대한 유권자들의 평가는 단호하게 이뤄져야 한다. 신줏단지 모시듯 해온 정책을 공약집에 조차 있는 그대로 떳떳하게 올리지 못하는 그들에게 자갈길 옆 넓고 긴 ‘민심로’의 존재를 표를 통해 보여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