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조선DB
삼성전자가 1일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지난 1969년 박정희 대통령과의 67회동을 계기로 설립된 삼성전자는 기존 식품과 의복사업을 주력으로 해오다, 전자산업에 진출하게된 계기가 된다.
당시 삼성전자는 직원수 36명의 삼성전자공업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1969년 1월13일 설립한 삼성전자공업은 자본금 3억3000만원, 첫해 매출은 3700만원에 불과했다.
산요의 하청 업체로 1970년 수출용 흑백TV 생산을 시작한 삼성전자는 출범 초기 한동안 경영난에 시달려야 했다. 산요는 핵심 기술 이전과 투자를 꺼렸고 값싼 노동력만 이용하고 싶어 했다. 정부 허가로 내수용 흑백TV 생산을 개시한 2년 뒤인 1974년에서야 비로소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당시 매출 133억원에 순이익은 6억원이었다.
1973년 유가 폭등(1차 오일쇼크) 충격에서 경기가 회복하기 시작한 1975년 6월 11일. 삼성전자는 9억원어치 주식을 공모하며 유가증권시장에 기업을 공개(IPO)했다. 당시 삼성전자 기업가치는 공모가액 기준으로 불과 30억원이었다. 현재 시가총액은 303조원에 달한다.
삼성전자는 흑자전환과 상장을 계기로 쇄신 인사를 단행했다. 상장 직전 주주총회에서 3남 이건희 당시 중앙일보 이사를 새 이사로 선임했다. 감사 자리는 이수빈 이사가 맡았다. 삼성은 이후 자체 기술 개발에 전념하면서 혁신적인 제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상장 당해엔 세계에서 세 번째로 예열이 필요 없는 순간수상방식 TV(이코노TV)를 출시했다. 1979년엔 윤종용 부장이 실무를 맡은 VCR사업부가 국내 최초로 녹화기(VCR) 개발에 성공했다. 기술 이전을 놓고 심한 갈등을 빚은 산요와의 관계는 1983년까지 단계적으로 청산했다.
◆ 이병철 "반도체사업은 나의 마지막 사업이자 삼성의 대들보가 될 사업"
고(故)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생전에 오랜 지인들을 만난 자리에서 이같이 말했다고 한다. 이병철 창업주가 마지막으로 뛰어든 사업은 바로 반도체다. 삼성은 이병철 창업주의 3남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주도로 1974년 한국반도체를 50만 달러에 인수해 반도체 사업을 시작했다. 올해로부터 45년 전이다.
처음부터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을 잘한 것은 아니다. 미국과 일본에 기술력이 10년 이상 뒤처져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한국반도체 인수 이후 트랜지스터 생산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생산품목을 갖추지 못했고 사업을 확대할 자금조차 부족했다. 삼성은 한국반도체의 내실을 다지기 위해 삼성전자의 반도체사업부로 흡수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반도체로 발령나면 퇴직하겠다는 직원이 나올만큼 상황은 좋지 않았다.
이병철 창업주가 전면에 나선 것도 같은 이유다. 그는 우수한 시설과 첨단 기술을 갖고도 부진을 면하지 못하는 이유는 경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국내외 전문가들을 만나 반도체 사업에 대한 장래성, 사업 전략 등에 대해 물었다. Semiconductor를 반도체(半導體) 번역한 오타니 다이묘 산켄전기 회장도 여러 차례 만났다.
전두환 정부의 컬러 방송 허용으로 컬러TV가 불티나게 팔렸던 1983년 2월 8일. 도쿄 오쿠라호텔에 머물던 73세 이병철 창업주는 홍진기 중앙일보 부회장에게 전화해 반도체 사업 진출 계획을 알렸다. “오늘을 기해 삼성은 VLSI(초고밀도집적회로) 사업에 투자하기로 한다.” 그의 결단은 곧바로 세상에 알려졌다. '우리는 왜 반도체사업을 해야 하는가'라는 선언문을 공식 발표한다. 이른바 ‘도쿄 선언’이다.
미국과 일본이 90%를 장악한 시장을 기술과 돈으로 추격하겠다는 무모한 결단이었다. 주위의 만류에도 이 회장은 일본 샤프, 미국 마이크론과 기술 이전 계약을 맺으며 사업 강행 의지를 불태웠다. 일본 반도체업계가 훗날 한국과 경쟁하는 ‘부메랑’ 효과를 염려하며 샤프를 비난하자 현지 신문 기고로 직접 진화에 나섰다. “한국이 배우려는 기술은 일본이 총력을 기울이는 첨단 분야가 아니다”며 안심시켰다. 1983년 9월엔 경기 용인시 기흥에 역사적 첫 삽을 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반도체사업부의 일본 기업들의 덤핑 공세 등으로 고전했다. 1984년부터 1987년까지 누적 적자는 1159억원에 달했다. 지금 삼성전자의 매출 규모로 본다면 작은 규모일 수 있지만 당시에는 엄청나게 큰 돈이다.
그러던 1980년대 중반 절호의 기회를 만난다. 저금리·저유가·낮은 원화 가치 등 ‘3저 호황’이었다. 삼성은 세계 메모리시장에서 빠르게 두각을 드러냈다. 1983년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 64K 디램을 개발했고, 이때의 메모리 반도체 부문의 투자는 1990년대와 2000년대로 이어지며 지금의 삼성전자 발전 기틀을 잡았다고 평가된다.
결국 1992년에는 권오현 이사 등 반도체 부문 인력들이 세계 최초로 64M D램 개발에 성공했고, 혁신을 거듭하던 삼성은 1993년 마침내 세계 메모리반도체 분야 점유율 1위 왕좌에 오른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조선DB
◆이건희 회장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두 바꿔라"
1987년 11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가 타계하면서 그의 셋째 아들이 2대 회장에 올랐다. 이건희 회장 시대의 개막이었다. 이건희 회장 취임 후에도 삼성의 외형적 성장은 계속됐다. 하지만 주력회사인 삼성전자가 만들어 판매하는 제품은 글로벌 시장에서 여전히 ‘3류’ 취급을 받고 있었고, '질'보다 '외형'을 중시하는 관습에 빠져있었다.
삼성 경영진은 전년에 비해 얼마나 많이 생산하고 판매했는지 양적 목표에만 집중했다. 부가가치나 시너지, 장기적인 생존전략과 같은 요소는 소홀하게 취급했다.
이 회장은 1993년 2월 전자 관계사 주요 임원이 참석한 가운데 미국 LA에서 전자부문 수출 상품 현지비교 평가회의를 개최했다. 그는 현지 매장의 한쪽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놓여있는 삼성 제품들을 살펴본 뒤 "먼지 구덩이에 처박힌 것에다가 왜 삼성이라는 이름을 쓰는가. 이는 주주, 종업원, 국민, 나라를 기만하는 행위"라고 통탄했다
결국 1993년 6월 7일 임원과 해외주재원 등 200여명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켐핀스키 호텔에 불러모았다. 그는 이 자리에서 "삼성은 이제 양 위주의 의식, 체질, 제도, 관행에서 벗어나 질 위주로 철저히 변해야 한다"며 삼성그룹 '신(新)경영'을 선언했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두 바꿔라"라는 그의 유명한 발언도 이 자리에서 나왔다.
이건희 회장이 외친 신경영은 양 위주의 외형만 강조하는 경영 관습을 타파하고, 질을 중점적으로 챙기는 새로운 경영구조를 만들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는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도 불린다.
이후 이건희 회장은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신경영 문화를 삼성에 뿌리내리기 위해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그 과정에서 삼성 임직원들에게 심리적 충격을 가하는 일들도 종종 시도했다. '라인스톱제', '휴대폰 화형식'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라인스톱제란 생산현장에서 불량이 발생할 경우, 즉시 해당 생산라인의 가동을 중단하고 제조과정의 문제점을 완전히 해결한 다음 재가동함으로써 문제 재발을 방지하는 제도다. 라인스톱제를 가장 먼저 도입한 곳은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세탁기 생산라인이었고, 이후 모든 전자 관계사 사업장으로 확대됐다. 전자제품의 경우 1993년의 불량률이 전년도에 비해 적게는 30%, 많게는 50%까지 줄어들었다.
1995년 3월에 있었던 불량 무선전화기 화형식은 품질 사고 대책의 일환으로 수거된 불량 제품을 임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500억원어치의 전자제품을 불태워버린 사건이다.
당시 삼성전자의 무선전화기 사업부는 품질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완제품 생산을 추진하다 제품 불량률이 무려 11.8%까지 올라가는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고, 이 회장은 품질사고 대책과 향후 계획을 점검하면서 고객들에게는 사죄하는 마음으로 무조건 새 제품으로 교환해주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이와 함께 수거된 제품을 소각함으로써 임직원들의 불량의식도 함께 불태울 것을 제안했다. 15만대, 500억원 어치의 제품이 수거됐고 화형식을 통해 전량 폐기 처분됐다.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은 삼성전자가 초일류 기업으로 거듭나는 데 결정적인 원동력이 됐다고 평가된다. 2000년대 초중반 무렵만 해도 삼성전자가 글로벌 기업으로 불리는 게 어색하게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삼성전자는 단지 글로벌 기업 수준을 벗어나 세계 전자·정보기술 업계에서 명실상부한 리더로 평가되고 있다.
2004년에는 일본 10대 전자업체를 합친 것보다 많은 순이익을 냈다. 이후 10여 년에 걸쳐 스마트폰 분야까지 글로벌 선두 업체로 자리잡았다. 이후 애플의 아이폰을 필두로 스마트폰 시장이 폭발적으로 확대되자 삼성전자는 소위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 전략을 사용해 스마트폰 시장의 강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2007년에는 휴대폰 부문에서 모토로라를 누르고 세계 2위의 핸드폰 제조업체에 등재됐다.
2009년 스마트폰 시장에도 뛰어들어 갤럭시 라인업을 발표했으며, 스마트폰 시장에 뛰어든지 2년만인 2011년 3/4분기 스마트폰 세계 1위에 오른다. 삼성전자는, 2012년 부터, 노키아와 애플을 제치고, 전체 휴대전화 점유율 1위, 휴대전화 부문 매출액 2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조선DB
◆ 부드러운 리더십 이재용 부회장, 위기엔 용단으로
이재용 부회장은 2014년 아버지 이건희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후 그룹 경영을 총괄해왔다. '회장' 타이틀을 달지는 않았지만 그룹의 총수 역할을 해왔다.
이 부회장은 지금까지 성장을 주도한 반도체, 디스플레이, 휴대전화, TV 등 주력 사업에서 초격차 전략으로 시장 리더십을 강화하고, 인공지능(AI), 5G, 전장, 바이오·헬스 분야에서 신수종 사업 발굴을 확대하는 경영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지난 2016년 국내 인수합병(M&A) 최대 금액인 9조 원을 투입하며 미국의 자동차 전자장비(전장) 전문기업 ‘하만’을 인수했으며, 이 부회장은 지난해 초 항소심 집행유예 선고로 석방되며 경영복귀한 이후 대규모 투자 방안을 계속 내놓고 있다.
지난달 10일 대형 디스플레이 사업에 2025년까지 13조1000억원을 투입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외부의 추격이 빨라질수록, 그 도전이 거세질수록 끊임없이 혁신하고 더 철저히 준비하겠다"며 "세계 경기가 둔화되고 여러 불확실성으로 인해 어려운 시기이지만 저희는 흔들리지 않고 차세대 기술혁신과 인재양성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이 부회장은 지난 6월1일 삼성전자 화성사업장에서 진행한 관계사 사장단과의 회의에서 "지난해 발표한 3년간 180조원 투자, 4만명 채용 계획은 흔들림 없이 추진해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활성화에도 기여해야 한다"며 미래를 위한 차질 없는 투자를 당부했다.
삼성전자는 지난 4월에도 시스템 반도체 경쟁력 강화를 위한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밝혔다. 삼성은 2030년까지 133조원의 투자와 1만5000명의 고용 창출을 골자로 하는 '반도체 비전 2030'을 통해 메모리 반도체에 이어 시스템 반도체에서도 세계 1위에 오르겠다는 방침이다.